만해선사 그가 꿈꾸던 세상은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평화와 평등이 뿌리내린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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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42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1-09-05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문화 Ⅱ 서브카테고리 만해축전 특집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종열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인제 만해마을=김종열 기자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7 10:46 조회 2,807회본문
만해축전을 맞아 만해 한용운선 사의 치열했던 삶을 조명해 보고 자한다.
승려로서, 독립운동가로서, 문 학가로서 살다간 선사의 삶은 오 늘날 불자들에게 큰 가르침을 남 기고 있다. 만해선사는 열강의 침탈 앞에 조선왕조의 국운이 다한 1879년에 충남홍성에서 청주 한씨 응준 거 사와 온양 방씨 사이의 둘째로 태 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익혀‘서 상기’를 독파하고‘통감’‘, 서경’, 기백삼주를 통달한 총명함으로 일 대의 자랑이었다.
14살 때 당시 조혼 풍습에 따라 천안 전씨 정수 와 혼인한다. 18세에 고향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서세동점하던 국제정세 속에 서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왕 조의 비참함을 지켜보다 의병활동 에 참가한다. 하지만 그의 노력과 는 달리 의병에 실패하고, 무작정 고향을 떠나 한양으로 향한다. 부 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일푼의 노 자도 없이 떠난 선사는 노행 중에 자신의 삶에 대해 깊 은 통찰을 한다. 앞날 을 위해 실력을 양성 해야겠다는 생각과 인 생의 의미에 대한 물 음으로 길을 돌려 보 은 속리사로 향한다. 선사는 다시 더 깊은 심산유곡의 대찰을 찾 아 설악산 백담사로 입산한다. 이곳에서 선 사는 탁발승이 되어 불도를 닦기 시작했다. 청춘의 몸을 한갓 도 포 자락에 감싸고, 염 불을 외우며 현세를 초탈한 삶을 살았지만, 세상에 대한 의구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어느날 선사는 청나라의 학자 ‘서개여’가 지은 ‘영환지략’이라는 책을 통해 넓은 세상을 보고자하는 마음을 키워나 갔다.
21살 되던해 선사는 세상의 견문을 넓히고자 원산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한다. 하지만 동행의 음모로 여러 가지 고난을 겪고 구사일생으로 귀국한 다. 이후 안변 석왕사등에서 참선 하며 유랑생활을 한다. 고향으로 돌아와서의 생활도 잠시, 다시 행 랑을 꾸려 백담사로 돌아간다. 27 살 되던해 정월 선사는 금련곡사 를 계사로 용운이라는 법명을 받 고 득도한다. 그로부터 3년간 선 사는 두문불출 불경과 참선에 빠 져 수행정진한다. 하지만 좁은 세 상에 갖혀있는다는 것이 사내 대 장부의 본의가 아니라 생각하고, 일본으로 탐방을 떠난다. 이시기 선사는 조동종 대학에서 청강하 며, 일본어와 불교학을 배운다. 이때 유학생으로 일본에 와있던 최린, 고원훈, 채기두 등과 교유 한다. 선사는 귀국과 동시에 박한 영, 전금파 등과 결의를 맺는다. 선사는 승려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위해 이시기 표훈사와 경기 도 장단군 화산사숙의 불교강사를 지낸다. 그후 선사는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다.
당시 일제는 조선의 불교를 일 본 임제종에 편입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선사 는 박한영, 장금봉등과 불교종무 원을 창설하고 일제의 음모로부터 조선의 불교를 지켜낸다. 1913년 35세때의 일이다. 이때 백담사에 서 탈고한‘조선불교유산론’이 책 으로 간행된다. 이듬해 선사는 불 교운동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는 몸이라 그 활동이 자유로울 수 없 었다. 선사는 이 또한 시절 운이 라 생각하고 통도사로 내려가 대 장경 연구에 몰두, ‘불교대전’을 간행하고 서울로 올라와 조선불교 회 회장에 취임한다. 1917년 12월 에 설악산 오세암에서 참선중 진 리를 깨치고, 오도송을 부르짖는 다. 이후 선사는 불교월간지‘유 심’을 창간하고 논설, 수필, 현대 시등 다양한 장르의 글들을 발표 한다.
1919년 3.1 운동은 선사의 삶에 있어서 큰 분수령이 된다.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육당이 작성한 기미독립선언서의 자구 수 정 및 공약3장을 첨가한다. 또한 33인의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 하고 일제에 체포되어 투옥된다. 옥중에서도 그의 독립운동은 계속 된다. 참회서 한 장만 쓰면 석방 해 주겠다는 유혹을 단호히 뿌리 친다. 오히려 상해임시정부의 독 립신문에‘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 의 대요’를 발표 독립운동의 불씨 를 이어 나갔다.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선사는 불교를 통 한 독립의식고취와 민족계몽운동 을 전개해 나간다. 이때부터 선사 의 문학 활동은 전성기를 맞는다. 옥중시‘무궁화를 심고자’를 개벽 지에, ‘조선 및 조선인의 번민’을 동아일보에 발표한다. 1925년 47 세 되던 8월 선사는 출가 사찰인 백담사에서‘님의 침묵’을 탈고하 고 이듬해 회동서관에서 발간한 다. 이후 선사는 김상호, 김법린, 최범술 등과 조선불교청년회를 확 대 개편한 ‘조선불교 총동맹’을 발족시킨다.
불교지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불교와 문 학, 독립운동으로 치열한 삶을 살 았다. 1933년 선사는 여러 지인들 의 도움으로 성북동에 심우장을 짖는다. 총독부 쪽을 보기 싫다는 이유로 북향으로 지은 심우장은 선사의 마지막 수행처가 된다. 선 사는 이곳에서 많은 문인, 독립운 동가, 스님들과 교류하며 조선 독 립의 그날만을 생각했다. 선사는 그리도 바라던 해방을 한해 앞두 고 사바세계와의 인연을 다하고 입적한다.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 비를 마친 후 망우리 공동묘역에 안치된 선사는 한 생을 불교와 민 족독립을 위해서 산 위대한 선각 자였다. 특히 선사의 업적은 불교 개혁에서 두드러진다. 『조선불교 유신론』에서 산중불교, 승려중심 의 불교를 도회지불교, 대중불교 로의 전환을 역설하였다. 그의 외침은 현재의 불교계가 다시 되새겨야 할 중요한 대목이 다. 한편 선사의 뛰어난 문학성은 『님의 침묵』을 통하여 근대 한국 문학의 큰 획을 그었다. ‘님’이라 는 대상의 보편성을 통하여 민족 정서의 확대와 정한을 구체화 하 였던 것이다. 이외에도 시조, 한시, 소설 등 다방면에서 우리 민족의 혼과 정 서를 노래한 뛰어난 예술가였다. 선사는 실천하는 민족지성이었다. 그가 추구했던 생명에 대한 존엄 성과 평화와 평등사상이야 말로 인류가 귀의해야 할 불교의 요체 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언제나 살아있는 시대정신이며 또 세대를 뛰어 넘고자 한 선각자의 모습이 기도 하다.
해마다 8월이면 강원도 인제 백 담사 만해마을 일원에서‘만해축 전’이 열린다. 선사의 정신을 가 장 잘 구현한 실천가들을 위한 만 해대상과 유심문학상을 시상한다. 전 세계에서 만해의 사상과 문학 의 세계를 체험하기위해 모여든 다. 만해 선사의 생명에 대한 존 엄성과 평화와 평등사상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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