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밀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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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94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7-09-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화령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철학박사 중앙교육원장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14 07:26 조회 3,209회본문
티벳밀교(1)
그러다가 7세기에 들어와서 송첸감포왕이 티벳을 통일했다. 이 시기에 송첸감포왕은 당나라 문성 공주와 혼인하였고 또한 네팔의 티쉰공주와도 혼인을하였는데 이 두 공주는 시집올 때 모두 자기 나라의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것을 계기로 티벳에서는 불교가 본격적으로 꽃 피기 시작했다. 새로운 통일국가에서는 새로운 이념을 필요로 하는 바 기존의 티벳 고유 신앙이었던 본교는 새로운 사회질서에 적합하지 못했다. 그러던차 불교가 들어옴으로써 왕실에서는 이를 크게 환영했던 것이다. 문성공주와 티쉰공주는 후에 각기 죠칸사와 라모체사를 세웠으며 송첸감포왕 또한 라사에 12개의 작은 절을 세웠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또한 불경의 번역을 위하여 인도문자를 참고한 티벳문자도 만들고 인도, 중국, 네팔 등지의 고승들을 초빙하여 많은 경전을 번역하게 했다. 특히 밀교 경전과 불상이 많이 들 어왔으며 왕실은 이를 적극 수용 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불교는 (밀교를 포함하여)아직 왕실 위주의 신앙이었으며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되지는 못했다.
송첸감포왕이 불교의 진흥을 위하여 노력했으나 그 뒤에 재위한 두 왕들이 내란과 외란으로 죽었기 때문에 불교발전은 답보상태에 있었다. 티데둑첸왕(704〜755재위) 때에 이르러 다시 당의 금성 공주를 맞이하여 절을 짓고 경전을 번역하는 등 불사를일으켰으나 본교의 권신들이 승려 들을 몰아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아들 티송데첸왕(755〜797재위)이 어려서 즉위했으나 본교의 세력에 눌려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 사이에 본교에 의한 대규모의 훼불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티송데첸이 성년이 되자 본교의 세력을 몰아내고 모든 신하들은 불교를 믿어야 한다는 법령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인도 나란다사의 학승 찬드라굽타를 네팔로부터 초빙하여 불교를 강의하게 하였는데 찬드라굽타는 중관파의 청변논사의 5대 제자이다. 그는 티벳에 와서 십선법, 십팔계, 십이인연 등의 불교의 기본지식을 가르쳤는데 이 소식을 들은 본교의 무리들이 자연 재해를 핑계로 강렬하게 불교를 반대했다. 찬드라굽타는 할 수 없이 네팔로 돌아가면서 티벳왕에게 인도의 저명한 밀교승이자 자기의 매부인 파드마삼바바를 추천했다. 원래는 나란다사 의 밀교고승인 붓다구히야을 초빙하려 했으나 각밀은 자기가 가는 대신에 대일경과 금강정경의 주석서를 전해주었다.
연화생은 티벳에 들어오자 밀교의 비법을써 본교의 무당들을 제압했다. 그는 본교의 신들이 항복하고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선포했다. 이로 인해서 본교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티벳에 밀교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연화생은 후세에 확립된 닝마파의 종조이며 아직도 구루린포체로 불리면서 종파를 초월하여 존중되고'있다. 이후에 티송데첸왕은 다시 찬드라굽타를 초빙하여 연화생과 함께 불교 를 확산시키도록 했다. 또한 티송 데첸왕은 티벳의 첫 번째 정규사 원인 상야사를 건립하고 인도에서 설일체유부 계통의 비구 12명을 초청하여 티벳인에게 구족계를 내리게 함으로써 최초의 티벳승려가 탄생했다. 티송데첸왕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교와 밀교의 경전을 번역하게 했으며 특히 밀교의 전파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티벳불교, 특히 밀교가 확립되는 데에는 송첸감포와 티송데첸 두 왕의 역할이 컸다.
<화령/철학박사 중앙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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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jpg 파드마 삼바바(연화생) (139.6K) 0회 다운로드 DATE : 2018-06-14 07:2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