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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와 편견의 한계를 넘어 선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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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42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1-09-05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인물 / 설화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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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7 10:37 조회 36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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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와 편견의 한계를 넘어 선 여성들
나혜석(1896~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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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은 1896년 4월 18 일 경기도 수 원시 장안구 신풍동에서 5 남매 중 넷째 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 주’이고 호는 ‘ 정 월 ’이 다 . 부친‘나기정’ 은 대한제국 때 경기도 관찰부 재판주사, 시 흥군수를 지냈다. 

‘나혜석’은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10살 때 집 근처의 삼일 여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 터 집안에 있는 것과 뒤뜰의 화초들을 그려 서 선생님께 보여 드려 그림 잘 그리는 학생 으로 칭찬을 받았다. 이것이 훗날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서는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 다. 1913년 진명 여자보통고등학교를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둘째 오빠 나경석이 아 버지를 설득하여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과 (유화과)에 입학하여 화가로서의 공부를 시작하였다. 도쿄유학 시절은 나혜석 의 모든 생각과 인간관계와 그의 인생이 결 정 된 때이다. 유화를 공부 한 사람은 여성으로 첫 번째 이며 남성까지 통틀어 4번째였다. 이때 오빠 나경석은 자신의 친구 최승구를 나혜석에게 소개 하였다.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발전 하였으나 최승구가 폐병으로 사망한 후에는 그의 인생관이 돌변하여 모든 희망을 예술에 걸었다. 1918년 귀국하여 함흥 영생중학교, 서울 정신 여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민족 의 독립문제에도 큰 관심을 가져 1919년 3.1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3월 25일 이화학 당 학생 만세 사건에 깊이 관여 함으로써 체 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감옥에서 나왔을 때에는 어머니마저 돌아 가시고 외로웠던 차에 아버지와 주변에서 시 집가라고 강한 압박을 해 왔다. 1920년 4월 드디어 6년 동안 꾸준히 구애를 해 왔던 변 호사 김우영과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첫딸을 낳고 어머니의 길과 화가의 길 사 이에서 많을 갈등을 하였다 어머니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위기감 이 정신적 긴장감을 높이면서 출산의 고통을 여성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표현 된 건 처음 이었다. 아무도 드러내놓고 말 하지 않지만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겪는 감정과 고 통들을 앞장서서 말 함으로서 다른 사람의 입을 열게 하는 역할을 했다. 1914년에 근대적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상적 부인]이란 글을 발표했고 동경 유학 생들의 친목회를 조직하고 [여자계]라는 잡지를 발 간 하는 등 여권신장 활동을 벌였다. 이 잡 지에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주제로 한 단 편소설 [경희]를 발표하기도 했다. 

1921년 7 월 [신가정]지에 봉건적인 결혼제도와 정조관 에 희생되는 여성의 비극을 그린 소설 <규원 >을 발표했다. 이후에도 <정순>등의 여러 작 품을 발표하여 소설가로도 많은 활동을 했 다. 1921년 3월 경성일보사에서 유화 70점으로 최초의 개인 유화 전을 개최 해서 대 성황을 이루었다. 나혜석의 작품이 전람회 때 대성황을 이룬 것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것, 수묵화가 아닌 유화인 것, 3.1 운동때 옥고를 치르고, 변호 사인 김우영이 남편이라는 것 등이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작품이 전시 되는 이틀 동안 5000여명의 관람객이 몰려 들었다. 그는 조선미술전람회 에서 1회에서 5회까지 입상했다. 1927년 6월 그는 어린 세 남매를 시어머니 에게 맡기고 남편 김우영과 함께 진정한 예 술을 찾아서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1년 9 개월의 여행에서 원하던 그림을 실컷 보고 새로운 세계를 접하면서 인생관 예술관을 확 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돌아와서 새로운 예 술을 펼칠 겨를도 없이 파리에서 최린을 만 나 연애한 것이 빌미가 되어 이혼 하게 되었 다. 결혼 생활 실패 후 화가로서의 삶에 더 욱 매진한 나혜석은 1931년 제 10회 조선미 술전람회에서 <정원>으로 특선하고 이 작품 으로 일본에서도 입선 하였다. 그 후 개최된 미술전에서는 거듭 실패하고 아들‘선’이 폐렴으로 죽은 후 나혜석은 불 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승려생활에 매력을 느껴 수덕사 아래 수덕여관에 오랫동안 머물 렀다. 이 곳에서 김일엽을 만나 많은 이야기 도 나누었다. 다솔사, 해인사에도 묵은 적 있 고 마곡사 근처에 방을 얻어 머문 적도 있다. 불교에 심취 했으나 불교에 귀의 하지는 않았다. 이 후 서울로 올라와 한 때 청운양 로원에 의탁하기도 하였다. 병든 몸으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서울에 나타났다가 냉 대를 받고 자취를 감추는 생활을 반복했다. 1948년 12월 10일 향년 53세로 추운 겨울 날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시립자제원의 의사에 의해 확인 되었다. 나혜석은 지금 시대에 태여 났으면 화가로 소설가로 수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보 람 있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는 시대를 너무 많이 앞서 가는 삶을 살 았던 여성이다. 

(자료:여성사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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