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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식의 의미와 천도불공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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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52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2-07-04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특별기고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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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화령 필자소속 - 필자호칭 정사 필자정보 중앙교육원장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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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6 08:05 조회 2,5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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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식의 의미와 천도불공의 의의
천도불공으로 극락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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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력 7월 15일은 하반기 49일 불공이 끝나 는 날이다. 총지종에서는 음력 7월 보름 대신 에 양력으로 이 날을 회향일로 정해두고 49일 동안 조상 영식천도를 위한 불공을 계속한다. 현교에서는 음력 7월 15일을 우란분절 혹은 백 중이라고 하여 조상의 영가를 천도하고 부모 의 은혜를 다시금 생각하여 크게 재를 올리기 도 한다. 총지종에서는 ‘영가(靈駕)’라는 말 대신에 영식(靈識)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래서 돌 아가신 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불공하는 것을 ‘영식천도(靈識薦度)’한다고 하는 것이 다. 원래 영가라는 말은 육체 밖에 따로 있다 고 여겨지는 정신적 존재를 말하며 흔히 죽은 사람의 혼백을 영가라고 한다. 원래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 과 같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러나 업력을 안고 가는 주체는 인정한다. 그 것을 불교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하는데 편의상 영식(靈識)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서는 자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영가나 영식은 또 뭔가라 고 의문을 품을 것이다. 불교에서 자아라는 것 이 없다는 말은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 다는 의미이다. 우리 마음도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의 근원인 아뢰야식 의 형태(겉으로 드러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 지만)도 끊임없이 변화하며 우리가 지은 업을 떠맡아 안고 가고 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기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 어머니도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서 영 생을 누린다는 식의 황당한 영혼관과는 차이 가 있다. 예를 들어 하늘나라에 올라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고 치자. 세 살 때 죽 은 누나는 세 살 때 모습을 하고서 팔십에 죽 은 자기를 반겨주겠는가? 아버지는 30대에 죽 어 젊은 모습을 하고 자기는 80살에 죽어 노인 모습을 하고서 가족이 재회를 한다?  조금만 상상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타종교에서 말하는 영혼관이 얼마나 엉터리이고 우스운 발상인가 를 알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아뢰야 식의 개념은 이러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원 을 달리하는 것으로서 이 아뢰야식이 우리가 지은 모든 업력을 간직한 채 새로운 연을 만나 게 되면 거기에 맞추어 또 다른 생명으로 모습 을 바꾸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우 리의 식에는 고정된 자아가 없다고 말하고 있 는 것이다. 이러한 성질의 것을 우리는 편의 상 영식이라고 부르는데 그러면 이러한 영식을 천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천도는 어 떻게 해야하는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 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 離), 태어나면 반드시 죽고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인생이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며 누구 도 이러한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 우리가 죽은 후에는 과연 어떻게 될 까? 그리고 영혼과 내세는 정말  있는가? 있다 면 어떤 형태를 띠게 될까? 등등에 대한 의문 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불교는 여기에 대해 확실한 대답을 하고 있다. 반드시 영식은 존재 하는 것이며 그 영식에 의하여 내세가 결정되 고 영식이 지은 업력에 따라 내세의 과보를 받 게 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의 육체 를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五蘊)이 화합된 것으로 본다. 즉 우리 의 몸을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결합으 로 보는 것이다. 색은 우리의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것이며 수,상,행,식은 정신적인 요소 이다. 이러한 5 가지가 결합하여 나라는 존재 를 이루고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 제행 무상(諸行無常)이기 때문이다. 나고 죽고 병 들고 늙는 그 모든 것이 변화의 과정이다. 객관 계의 물질도 마찬가지로 만들어지고(成), 얼 마간 지속되다가(住),파괴되어(壞), 없어지는 (滅) 변화를 겪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 를 포함한 모든 것은 무상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상한 가운데에는 나라고 고집할 만 한 변하지 않는 실체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무아라고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한 과정 속에서 잠시 나라고 생각 되는 존재가 나타날 따름인데도 우리는 그러 한 일시적인 존재가 영원한 나인 것처럼 착각 하고 욕심부리고 화를 내면서 자기 몸을 보호 하고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천의 과정에서 오직 아뢰야식만이 한 줄기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영속적으로 우리의 업력 을 보존하고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업력을 실어 나르고 있다. 업력에 따라 우리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 천해 가는 원인은 나라고 여겨지는 이것이 여 러 가지 인연들이 모여서 성립되기 때문인데 이를 인연화합 또는 연기(緣起)라고 한다.  우 리의 몸은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사대(四大)를 바탕으로 영식이 인연에 따라 결합되어 유형화된 것이다.  지·수·화·풍 의 사대 자체는 본질상 변함이 없지만 일단 유 형화되면, 즉 육체의 형태를 지니게 되면 생· 노·병·사의 변천이 불가피하게 되는 것이 다. 이러한 변천과 윤회의 주체가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아뢰야식, 즉, 영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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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식에는 안(眼)·이(耳)·비(鼻)· 설(舌)·신(身)의 5식(識)과 현재의 사실을 헤 아리고 판단하는 의식(意識), 그리고 우리가 “ 나”라고 집착하며 온갖 번뇌 망상을 일으키는 제7식인 말라식(末那識)이 있으며, 우리의 업 장을 보존하여 다음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원 동력이 되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있다. 이 아뢰야식은 이 생에서의 우리의 모든 행위, 즉 신(身)·구(口)·의(意)의 삼업을 빠짐없이 보존하고 있다가 내세(來世)의 삶을 결정하게 되고 거기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아뢰야식 의 작용 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것이 여 타의 식에 영향을 끼침으로서 현재 우리의 육 체와 정신계를 활동하도록 하고, 또 살도록 유 지시키면서 모든 선악의 행동을 나타나게 하 는 생명의 주체라는 점이다. 우리의 죽음이라 는 것은 이 아뢰야식이 우리의 육체를 완전히 떠났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부파불교의 학설에 의하면 인간이 사망한 후 다음 생을 얻기까지의 영식을 중유(中有), 혹은 중음(中陰)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중음천에 떠도는 불쌍한 영식” 이라고 할 때의 중음이 바로 이것이다.  이 중음천에서는 영식 이 다음에 태어날 곳을 찾아 헤메고 다니는데 중유가 평소에 지은 업의 무게에 따라 태어나 는 모습과 태어나는 곳도 달라지게 된다. 또한 이 중음천에서는 업력이 같은 중유끼 리는 서로 친하고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악업 의 중유는 악업끼리, 선업의 중유는 선업끼리 서로 끌어당긴다고 한다.  우리가 돌아가신 분 의 영식왕생뿐만 아니라  모든 유연영식의 왕 생성불을 기원하는 것도 선한 영식끼리 서로 끌어당기도록 도와주는 것이 된다. 아뢰야식에 보존된 업력은 중유를 인도하는 원동력이 되는데 가령 악업이 많은 중유가 미 래의 출생처를 찾을 때  악업의 힘이 중유의 지혜로운 판단을 흐리게 하고 또 착각을 일으키게 하여 지옥과 축생, 아귀와 같은 삼악도를 극락세계와 같은 낙원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 이다. 그리하여 악업이 많은 중생은 스스로 달 려가서 태어나게 되는데, 태어나자마자 그곳 에서 가하는 고통을 업보로 받게 되며, 반대로 선업을 많이 닦은 영식은 지옥과 극락 등 미래 의 세계를 올바르게 판단하여 태어나도록 그 선업이 안내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악업 은 무지를 나타내고 선업은 지혜를 나타낸다 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평소에 수행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이다. 누군가가 사망한 직후 에 49일간 천도불공을 집중적으로 해 주는 것 은 중유에 머무는 영식이 불공공덕에 의해서 조금이라도 지혜를 더 얻어서 좋은 곳에 태어 나게 하려는 의도이다. 보통 영식이 중유에 머 무는 기간은 49일 정도라고 한다.  죽어서 선업이나 악업 가운데 어느 한쪽이 아주 강하게 나타나면 지옥 또는 천상계에 즉 시 가서 출생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 의 경우는 선업과 악업이 혼재되어 아뢰야식 에 보존되어 있으므로 여러 인연이 화합하여 다음 생을 받게 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기간 이 걸리는데 그 기간이 7일 내지 49일이다. 물 론 49일이 훨씬 지나서도 태어날 곳을 찾지 못 하고 중음천을 떠도는 영식도 있지만 대체로 는 이 기간 안에 다음 생이 결정되기 때문에 사 십구재를 올려 영식천도를 기원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평소에 자신의 몸에 대한 애착 은 물론 재산과 처자권속 그리고 명예 등에 대 한 애착으로 뭉쳐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죽은 영식도 이러한 애착은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이다. 애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다음 생을 받지 못하고 중음천에 떠도는 기간이 길 어지게 된다. 이것은 살아있는 우리가 망자(亡 者)에 대하여 가지는 애착과 더불어 망자 자신 의 영식도 생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해 혼란 과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 에서는 이러한 영식의 애착을 제거하고 영식 으로 하여금 지혜로운 판단을 하게 하여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천도불공을 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가지력(加持力)과 여러 불보살의 원력(願力)을 통하여 무지한 영식을 깨우쳐 살아 생전 자기에게 가졌던 부질없는 집착과 망상을 떨쳐버리고 무상한 진리를 간 직하고 깨달음으로서 바른 길을 따라 왕생성 불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데에 천도 불공의 의의가 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인간을 제도하고 교화하 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후의 영식을 교화하여 천도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이 유상(有相)의 인간 만을 생각하고 몸을 벗어 보이지 않는 무상(無 相)의 영식은 잊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사후의 영식도 오직 형체만 없을 따름이지 생각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우리와 꼭 같다고 한다. 한 집안에 어른이 아파 누워 계시거나 탈선 한 자녀가 있으면 집안식구들의 마음이 편하 지 못하듯이 선망부모나 일가친척 선대의 조 상 가운데 누군가가 삼악도에 떨어져 한없는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 가족의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가 직접적 으로 느끼지 못할지라도 고통받는 영식은 항 상 이승의 가족이나 친척이 구원의 손길을 뻗 어주기를 갈망하고 있다. 비록 우리 중생의 삶이 자업자득이라 영식 이 고통받는 것도 스스로 지어서 그런 것이나 우리가 지성으로 불공하고 왕생성불을 기원하 면 부처님의 위신력과 불보살의 한량없는 대 비심에 가지하여 영식이 천도될 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의 복업과 공덕도 한량없게 되는 것 이다.  더구나 선망 부모가 저지른 죄업의 대 부분이 자식들을 위한 애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살아 생전에 효도하는 것은 너 무나 당연한 것이며 돌아가신 뒤에도 천도불 공을 통하여 극락 왕생의 길로 인도해 드리는 것이 살아있는 우리들의 마땅한 도리라 아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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