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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관 -선정의 상태는 정신통일과 뛰어난 지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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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49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2-04-03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교리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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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화령 필자소속 - 필자호칭 정사 필자정보 중앙교육원장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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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6 10:45 조회 1,73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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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불교의 선정 (9회)

염불관 -선정의 상태는 정신통일과 뛰어난 지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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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관이라는 것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은 누구에게나 다 적합한 수행법으로서 부처님을 관하는 것에 의하여 심신의 정화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신통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염불관인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염불과는 차이가 약간 있다.

우 리 가 지 금 염 불 이 라 고 하 면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을 외우는 것처럼,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원래 부처님을 염한다고 하는 이 ‘염불’이라는 것은 부처님을 명상하는 것이다. 즉, 생각으로 부처님을 떠 올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칭념염불(稱念念佛)’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에 의하여 부처님을 우리 마음에 떠올리는 명상 수행의 한 방법일 뿐이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누구든지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이 칭념염불이 주류가 되어 마음으로만 부처님을 생각하는 관상염불(觀像念佛)은 그다지 행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원래의 염불의 뜻은 마음 가운데에 부처님을 생각하는 관상염불이라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오정심관이나 오선문과 같은 수행법은 주로 북방불교에서 행해지는 것이며, 남방불교에서는 선정에 드는 방법으로서 40종의 업처(業處)를 설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업은 선정을 의미하며, 업처라는 것은 선정의 토대 혹은 관법의 대상을 말한다. 관법의 대상으로서는 물질적인 것은 물론 관념적인 것도 모두 포함된다.  이 방법은 처음에는 구체적인 사물을 관하다가 나중에 숙달되면 구체적인 사물이 없어도 관념상으로 마음에 대상을 떠 올리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법은 염불관에서 처음에는 구체적인 불상을 앞에 놓고 관하다가 나중에는 마음으로만 부처님을 떠 올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수행방법은 40종의 업처 가운데에서 수행자의 성격에 맞는 적당한 업처를 선택하여 행하다가 점차 상위의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수행자의 성격 등에 맞추어 선택하는 업처를 ‘응용업처(應用業處)’라고 한다.

여기에 대하여, 모든 수행자들에게 공 통 으 로 사 용 되 는 업 처 를 일체업처(一切業處)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보통 자(慈)와 사념(死念)과 부정(不淨)의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자(慈)’는 자비심을 이용한 선정으로서, 처음에는 일정한 구획을 정해 놓고 그 구역 안에 있는 모든 것에 자비심이 미친다고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점차로 그 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사념은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모든 집착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집착할수록 도리어 괴롭게 되는 성질이 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죽음이라는 것을 초월하게 될 때에는 집착을 벗어나게 되므로 오히려 삶이 더 풍요로워질 수가 있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도리어 번뇌를 벗어나게 되고 마음이 고요해 질 수 있으므로 사념관의 명상을 하는 것이다.

부정관은 우리 몸의 온갖 부정함을 생각함으로써 욕정을 누르고 육신에 대한 애착을 벗어나게 하여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는 명상법이다.

불교에서의 선정법은 이러한 것만 아니라 각자의 근기에 맞추어서 행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예를 들면,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서 말 하 는 반 주 삼 매 , 《 법 화 경 》 에 서 말하는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 《화엄경》에서 말하는 해인삼매(海印三昧), 천태종의 《마하지관(摩訶止觀)》에서 말하는 사종삼매(四種三昧), 밀교의 아자관(阿字觀),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이나 오자엄신관(五字嚴身觀) 등 실로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지만 대략적으로는 앞에서 설명한 이러한 것들이 기본이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선정은 이처럼 정이나 관, 혹은 삼매라는 이름이 붙여져서 지혜를 개발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다른 종교나 사상 등에서는 불교에서와 같은 체계적이고 다양한 수행법을 찾아보기기 힘든다. 불교에서는 지혜를 개발하기 위하여 일상생활에서의 여러 가지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실천 방도도 설하고 있지만, 선정을 활용한 더욱 깊고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고등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좋은 실천방법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많은 불자들이 기복의 차원에만 머물러 진정한 해탈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 불교도들이 다 함께 반성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선정을 구분할 때는 정신통일의 정도에 따른 구별과 마음의 청정함에 의한 구분을 해 볼 수가 있다. 정신통일의 정도에 따른 구분으로서는 마음이 산란하고 통일되지 못한 상태에서 마음이 어느 정도 통일된 욕계정으로부터 색계 사선을 거쳐 무색계정의 최고 경지인 비상비비상처까지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구분법에 따르면 오정심관이나 사십업처 등의 대부분은 욕계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선정에 들었을 때의 청정함에 의한 구분은 그 마음 가운데의 지혜의 유무에 따른 구분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반드시 정신통일의 상태와는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서, 최고의 정신통일을 이루는 무색계정에서도 무루의 지혜를 지니지 못하면 범부의 선정과 차이가 없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완전히 통일을 이루지 못한 욕계정에서도 거기에 깨달음의 지혜가 들어 있으면, 그것은 뛰어난 무루의 선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정신통일이 완전하지 못한 욕계정에 속하는 수식관이라도 거기에 지혜가 포함되어 있으면 아라한과를 얻고 육신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가장 뛰어난 선정의 상태는 정신통일과 뛰어난 지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겠지만, 그러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와 관이 균등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색계사선이 바로 지관균등의 이상적인 선정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색계 제사선이 가장 이상적인 선정이라는 것이다. 

정학에서 추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최고의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다. 즉 정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든 괴로움을 벗어버리고 열반에 이르기 위한 지혜를 획득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선정을 통하여 어떤 황홀한 상태를 경험한다거나, 정 그 자체의 편안함에 도취되어 그것을 즐기는 것은 바른 선정이라고 할 수 없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마경(魔境)이라고 한다. 외도들 가운데에는 이러한 선정에 잘못 몰입되어 그러한 신비적 상태에 도취하면서 그것을 탐하는 것에 그치고 지혜의 개발은 등한시 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세간의 도사라는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종류의 선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러한 사람들은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모두 마경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깨달음의 지혜는 나올 수가 없다. 어느 정도 까지는 그럴싸한 말을 해도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무명의 상태에 머물고 있으며 번뇌 가운데에 머물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선정의 위험에 대해 주의를 하라고 옛날부터 엄하게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선정을 배울 때에도 바른 스승 밑에서 바른 방법을 배워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바른 선정을 가르쳐 줄 분들이 무척 드물다는 데에 또한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 아무튼 정학에서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선정을 즐기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정을 통해서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한 것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이것이 외도의 명상과 불교의 선정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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