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와 편견의 한계를 넘어 선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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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44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1-11-05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인물 / 설화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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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7 09:14 조회 2,663회본문
이일정(1876~1935)
이일정은 아버지 선재와 어머니 송씨 사이에 외동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 했다. 열여섯살이 되던 해 형조판서를 지낸 김병시 의 중매로 서른네살의 이준과 혼인 하였다. “고향 에 처자가 있는데 어떻게 또 혼인을 할 수 있겠느 냐?”는 이준의 말에 김병시는 장래를 위해 오른팔 이 될 동지가 필요하다며 혼인을 적극 권했다. 이 일정의 어머니도 김병시가 인정한 사람이라면 두 말없이 따르겠다 하여 혼인이 성사 되었다. 이준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이복 형, 이원계의 17대손이었고 헤이그 밀사로 우리 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 후 이일정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이준의 훌륭한 동지가 되었다. 이준이 국채보상 연합회 의소의 초대 소장으로 추대되자 이 운동을 위해 서울지역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준이 항일운동을 하다 구속 되었을 때는 시위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남자들과 함께 종로 거리에 나가 시위대열 제일 앞에서 연설하는 대담함을 보여 주었다. 이준이 유배당했을 때는 뒷바라지와 집 안 살림을 도맡아 했다.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이일정은 “여자도 반드시 혼자서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 다. 1905년 그가 이준의 동의를 얻어 살던 집을 팔 아 안현동(지금의 안국동)에 상점을 열었다.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목적으로 여성이 직접 경영하고 여성이 쓰는 물건만 파는 상점으로 가 게 이름은 ‘안현 부인상점’ 이었다. 개화 물결이 밀려들긴 했지만 점잖은 양반은 굶주릴지언정 학문에 힘써야지 이익을 바라는 일 에 나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양 반집 여성은 외부출입을 함부로 할 수 없던 시 절 과거 급제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생출신 인 이준의 아내가 상점을 연 것은 대단한 사건이 었다. ‘안현 부인상점’은 전면을 유리로 장식했다. 당 시에는 가장 앞서가는 인테리어였다. 이일정은 직접 상점에 나와 바늘, 실, 실패, 단추, 분, 머릿 기름, 빗, 비누 같은 여성용 필수품과 살림살이를 팔았다. 그 시대에 가장 현대적인 잡화상이었다. 가게는 인기가 높았고 주인이 여자라 점잖은 댁 마님들도 안심하고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몸종을 거느리고 와서 마음 놓고 물건을 골랐다.
양반 댁 부인으로 상점을 스스로 운영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고 이준의 아내가 상점을 열었다니 호기심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 질도 받았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격려 해 준 이는 남편 이준이었다. 1907년 이일정은 상 점 수익금 일부를 일본에 공부하러 간 유학생들 의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대한매일신보’에 기고 한 의연금 모집문에 “교육으로 인재를 길러 나 라를 바로 세우고 문명 부강하게 되면 여성의 삶 도 나아져서 자유와 권리가 확보되리라”고 주장 했다. 이 글을 읽은 장안의 부인들은 너도나도 의 연금을 냈다. 이일정은 신소당과 함께 여자 교육회의 부총무 를 했고 신소당의 공동학교에서 교감도 하며 여성근대교육운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아이 교 육은 어미 품에서 시작된다. 그 어미가 지식이 모 자라면 자녀교육을 올바르게 할 수 없다. 이런 이 유로 여성 교육은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민족이 발전하려면 여성들이 깨달아야 하고 그 첫걸음은 여성교육에 있다. 이일정은 국채보상운동에도 적 극 뛰어들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우리정부가 일본 에 진 빚 1300만원을 갚자는 국민운동이었다. 반 지와 노리개가 많이 모였고 애써 모은 돈을 내놓 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다. 1907년 4월 이일정 은 남편 이준을 떠나 보냈다. 고종의 밀명을 받고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났 다. 이준은 을사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맺어 진 불평등조약임을 만천하에 알리려던 뜻을 이루 지 못하자 자결했다. 그는 남편의 유해라도 보고 안고 싶었다. 3년 뒤 유해를 찾으러 먼 길을 떠났 지만 빈 손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해는 장사에 머물고 추색은 깊은데 어디 가서 낭군을 조상해야 하는가?” 라는 시를 남겼다. 자신을 높게 평가하고 아끼던 남편을 잃은 아 픔은 이일정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잡고 괴로움을 주었다. “나는 나를 늘 준치라는 생선처럼 생각합 니다. 이 세상은 내 몸과 마음에 너무 많은 가시 를 꽂아 주었습니다.” ‘신동아’ 잡지 인터뷰에서 한 말로 그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 수 있 는 대목이다. 53세가 된 이일정은 종로 3가 단성 사 뒤쪽의 조그만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는 슬픔에만 얽매어 살지는 않았다. 적극적으로 세상과 마주하고 이 나라의 주권을 되찾는 길에 매진 하였다. 1935년 이일정은 외동딸 종숙이 지켜보는 가운 데 그토록 바라던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58세로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나서 야 이준의 유해는 돌아왔다. 1963년 두 사람은 서 울 수유리에 나란히 묻혔다. 이일정 그는 진정 여성 교육과 애국계몽에 힘 썼던 여장부였다. 이준 열사 부인 이일정에서 더 나아가 애국계몽운동가 이일정이었다. (자료:여성사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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