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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같은 영화〈위대한 잠묵〉 신의 길, 인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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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53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2-08-08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영화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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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은주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김은주 자유기고가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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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6 07:43 조회 1,67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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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영화에서 불교보기 (23회)

명상 같은 영화〈위대한 잠묵〉 신의 길, 인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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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는  종교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신에게 헌신하는 길과 자아를 탐구하는 길입니다. 신에게 헌신하는 대표적인 종교는 크리스트교이고, 자아를 탐구하는 대표적인 종교는 불교입니다. 신에게 헌신한다는 것은, 인간의 역할을 오직 신을 숭배하는 존재로만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자아를 탐구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바로 신처럼 완벽한 존재라는 개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벽한 존재라 해서 손 놓고 있을 순 없습니다. 그 완벽함이 드러나도록 수행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신을 구하는 종교와 다르지가 않습니다. 신을 믿는 종교인들은 밖에서 신을 구합니다. 반면에 자아를 탐구하는 이들은 자기 내면에서 신처럼 완벽한 것을 찾습니다. 결국은 안과 밖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그들이 구하는 대상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안에서 구하고, 다른 하나는 밖에서 구한다고 했는데, 선불교의 이론을 빌어 안과 밖이라고 구분 지을 만한 게 없다고 한다면 안과 밖이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을 구한다는 방법만 오롯이 남게 되므로 결국은 한 가지 길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논리로 보면 종교 간의 분쟁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불교니 기독교니 하지만 종교 간에는 풀빛과 녹색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비종교인에게서 다른 색깔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의 맞은편에는 물질을 숭배하는, 욕망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게 맞습니다. 신에게 헌신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의 길을 가는 것이고, 욕망을 따르는 사람들은 인간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은 인간의 길을 가고 있을 것입니다. 과학문명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더욱 빠른 속도로 물질로 이동하는 양상입니다. 이렇게 정신의 황무지와 같은 시대에도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영화가 있습니다. 

<위대한 침묵>(프랑스, 2009)이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등장에 사람들은 한동안 술렁였습니다. 저예산의 다큐멘터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종류의 영화에 대한 찬사는 여러 언론을 도배했고, 영성에 목말라 있던 사람들은 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신의 길을 가는 신부님들의 세계를 보여준 영화 <위대한 침묵>은 신선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가질 법한 모든 욕망을 끊고 신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주의 세상에서 욕망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많이 새로웠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은 실재 신부님들의 일상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신부님들은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본원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의 수사들입니다. 영화감독인 필립 그로닝은 혼자서 카메라 한 대 달랑 들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1년 반 동안 신부님들과 함께 생활하며 신부님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는 이 영화를 찍기 위해 무려 15년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1984년 영화학도였던 필립 그로닝은 수도원에 촬영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하고 무려 15년을 기다려서 마침내 허락을 받았던 것입니다. 허락은 했지만 조건이 까다로웠습니다. 감독 혼자 들어와 수행에 방해되지 않게 조용하게 촬영해야 하고, 개인적인 관념이 들어가는 걸 차단하기 위해 일체의 음향이나 자막도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오직 본 것만을 영화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신부님들의 일상이 어떠한 개입도 없이 그대로 보여지는 편입니다. 신부님들의 일상은 너무나 단조로웠습니다. 새벽 6시 30분에 일어나 미사를 올리고, 저녁에 다시 미사 올리고, 자정께 또 미사 올리고, 이렇게 세 번 미사 올리고, 나머지 시간은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다른 신부님과 대화도 나눌 수 없습니다. 묵언이 원칙입니다. 복도를 지나다닐 때도 상대의 얼굴을 마주보지 않기 위해서인지 망토를 걸치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지나가고, 식사도 벽에 뚫린 배식구로 담당자가 넣어주면 혼자서 먹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상영 내내 미사를 올리기 위해 복도를 걸어가는 신부님과 혼자서 성경 읽거나 기도하는 신부님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게 됐습니다. 기도하고 성경 읽고 미사 올리고, 내일 또 그 일의 반복이고, 또 다음날도 오늘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않으니 새로운 정보가 들어올 것도 없고, 감정이 출렁일 일도 없었습니다. 오직 신과의 연결에만 집중하는 삶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몇 번 졸았습니다. 졸다가 일어나도 걱정할 건 없었습니다. 졸기 전에 보았던 그 장면이었으니까요. 여전히 신부님은 망토를 걸친 채 미사를 드리러 걸어가거나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커피 스푼으로 재는 인생’이었습니다. 보는 사람도 지겨운데 그런 일상의 주인공들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단조로운 일상을 50년 동안 반복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듯싶었습니다.  신참 신부님이 혼자서 빵을 먹으면서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에서 나는 그 신부님의 마음이 괴로울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칠 것 같은 권태와 싸우고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갑갑함을 견디지 못하고 수도원을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자유입니다. 누구에게 자유냐 하면, 신부님이 갖고 있던 욕망이 자유를 얻습니다. 수도원에서 고통스러운 것은 욕망이 통제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에는 욕망을 위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잠도 마음껏 푹 잘 수 없고, 밥도 혼자서 먹습니다. 혼자서 먹는 밥도 신통치가 않습니다. 마른 빵에 희멀건 스프와 생야채가 전부입니다. 그것도 하루에 한 끼 뿐입니다. 또한 자정께 미사를 올리기 때문에 잠도 마음껏 잘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지만 묵언이 원칙입니다. 정말 욕망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욕망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생활입니다. 욕망을 억제하면서 수사들이 얻고자 한 것은 신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인간의 욕망을 완전히 버려야 채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채워진 신은 행복이고, 평화였습니다. 수도원 생활이 오래된 신부님들에게서는 평화와 행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고참 수사들은 자신의 삶에 완벽하게 만족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느려터지고 단조로운 일상에 완전히 동화돼서 행복을 느끼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볼이 발그레하고 어린애처럼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해복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억지로 꾸미는 표정이 아니라 정말로 행복한 표정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더 많이 벌고자 하고, 더 맛있는 것을 먹으려 하고, 더 좋은 잠자리에서 자려고 하고, 더 많은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고, 점점 더 좋은 것을 구하려고 합니다. 이런 걸 구하는 게 행복해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욕망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서 욕망을 억제해서 행복을 성취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메커니즘과는 반대되는 양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논리는 관객인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린 욕망을 억제해야 했습니다. 2시간 40분 동안은 참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동안 몸도 뒤틀리고 마음도 갑갑했습니다. 이런 고통을 느끼는 것은, 욕망이 통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욕망의 통제를 통해서 우린 영화가 끝난 후 평화를 얻었습니다. 영화를 보고났을 때 꽤 오랫동안 명상을 하고 났을 때처럼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고 잔잔한 평화와 맑은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위대한 침묵>은 새로운 종류의 영화였습니다. 대부분의 영화는 오욕칠정의 감정을 다룸으로써 또 다른 욕망에 부합했는데 <위대한 침묵>은 욕망을 억제시키는 영화였습니다. 욕망을 떠난 곳에서 한순간이나마 깊은 평화를 느끼게 했습니다. 욕망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맑은 샘물과도 같은 영화였습니다.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만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비록 다른 종교의 수행자지만 물질이 아닌 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그들의 삶은 많은 가르침을 주었고, 우리 안의 자성자리를 돌아보게 하는 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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