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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적정(涅槃寂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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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4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07-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지혜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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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태원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칼럼리스트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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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07-11 13:14 조회 1,58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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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적정(涅槃寂靜)

마빈 해리스는 ‘문화의 수수께끼’라는 책으로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문화인류학자입니다. 인도의 암소 숭배나 유대교나 이슬람의 돼지 혐오와 뉴기니섬 원주민의 돼지 숭배와 같은 것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전쟁과의 관계 같은 것들을 매우 설득력 있게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화물 숭배와 같은 것을 통해 종교의 발생 배경을 다루기도 하였습니다. 


 ‘문화의 수수께끼’의 내용 중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유령 화물’과 ‘구세주’, 그리고 마녀를 다루는 책의 후반부라고 생각합니다. 원시부족이 외부인들이 비행기를 통해 가져온 물건들에 홀려서 자신들의 조상도 이같은 물건들을 가져오리라는 희망속에 비행기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종교적 행위를 치르는 내용이 나옵니다. 종교가 성립하는 원인으로 복을 부르고 화를 피하는 것으로 보는데, 유령 화물은 구체적인 사례의 하나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메시아사상도 내가 포함된 우리 종족을 구원한다는 것은 지배적 위치로 올라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책에서 전투적 메시아니즘이라고 부르는 현상은 그 배경에 이민족의 지배라는 상황이 놓여있지만 약자에서 강자로 변신해서도 전투적 성격은 유지되어 자신보다 약자를 억압하는 행태를 보입니다. 종교의 목적이 다른 종족이나 민족이나 인종을 억압하고 수탈하기 위함에 있는 걸까요? 


 불교는 그러한 전투적 메시아니즘과 결을 달리합니다. 전투적 메시아니즘은 실제적 권력과 재화를 얻게 만들지만 불교는 그런 것들을 버리라고 합니다. 정반대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가 욕망을 무한대로 충족시키는 지고의 복락을 맛보는 것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불교는 열반(涅槃, nirvana)를 제시합니다. 열반은 불이 꺼진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적정(寂靜)이라고도 합니다. 욕망을 붙잡고 그것을 충족시키려는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는 욕망을 놓아버리는 길을 제시합니다. 불교와 같은 방향을 제시하는 종교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를 크게 둘로 나눈다면 불교와 불교 아닌 것으로 구분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지요. 특히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수행은 세속적인 건강법으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덕산(德山) 스님은 20세에 출가하여 경과 율을 공부하였습니다. 특히 『금강경』에 능통하여 그의 속성을 따서 세상에서 ‘주금강(周金剛)’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중국 남방에서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하는 선종이 널리 전파되고 있었는데, 이에 그들을 교화하겠다는 마음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점심때가 되었는데 마침 길가에 한 노파가 떡을 팔고 있었습니다. 이 노파와 덕산 스님 사이에 문답이 이루어집니다. 노파가 떡을 주면서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면 떡을 주겠다며 한 질문이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들어 질문하였습니다. 즉 “‘과거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 스님은 지금 어느 마음에 점심(點心)을 하시려고 하십니까?” 이 돌연한 질문에 덕산 스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선문답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암호문처럼 비춰지곤 합니다. 저는 떡으로 점심을 먹는다는 행위는 구체적인 일상적 삶을 가리키고 금강경은 그런 일상의 삶을 추상(抽象)한 내용으로 이해합니다. 일상의 삶은 너무나 다양하지만 모든 종교의 경전은 상대적으로 간략합니다. 선문답의 구조는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주고받은 문답입니다. 밭을 갈고 땔감을 하고 밥을 짓는 일상속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선종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별도의 종교적 공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내용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덕산 스님은 이윽고 용담숭신 선사를 만나 공부를 하다가, 하루는 밤이 깊도록 숭신스님 방에서 공부하다가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밖이 너무 어두웠습니다. 용담 선사는 촛불을 건네주었는데 덕산이 받아들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입김으로 불을 꺼버렸습니다. 이때 덕산은 활연히 깨쳤다고 합니다. 여기서 촛불을 경전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경전은 안내자일 뿐 깨달음, 또는 구원은 스스로 찾아야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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