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 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피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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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59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3-02-01 신문면수 11면 카테고리 영화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은주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김은주〈자유기고가〉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1 12:39 조회 2,237회본문
베니 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피에타>
그런데 이번에 소개할 영화〈피에타.〉는 천작〈봄 '여름;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는 반대의 경우혀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피에타〉의 겉모습은 크리스트교적입니다. 제목에서부터 크리스트교적 색깔을 보입니다. 이탈리아어이’피에타'는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을 갖고 소으며, 통상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지칭합니다. 영화는 이 조각상과 '피에타' 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많은 모티브를 얻어왔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영화의 포스터는 조각상과 유사하게 표현됐으며, 포스터 카피는 '자비를 베푸소서'입니다.
또한 영화가 진행되는 간간이 '할렐루야는 영원하리라’ 라는 글귀와 함께 교회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그러니〈피에타〉의 겉모습은 영락없는 기독교 영화입니다. 그러나 영화를 해석해보면〈피에타〉를 기독교 영화가 아닌 불교 영화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조각품〈피에타〉와 영화〈피에타〉의 포스터를 비교하면, 예수의 역할을 강도가 맡았고 마리아 역할은 미선이 맡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순결하고 깨끗한 예수와 달리 강도는 ’악마새끼’라고 불리던 사람이고, 성스러운 모성애를 상징하는 마리아와 달리 미선은 복수의 화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점 때문에 이 영화를 기독교적이기 보다는 불교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간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그는 성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고 원죄를 갖고 태어난 인간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악마새끼 강도를 예수의 자리에 앉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인간 중 어느 누구도 예수의 자리를 넘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예수와 강도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악마새끼를 예수의 위치에 놓는 우를 범하고, 영화의 내용에서도 악마새끼가 참회를 통해 예수처럼 순결한 인간으로 재생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강도를 예수로 탈바꿈시키려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런 가치관은 신과 인간을 수직적 관계로 바라보는 기독교인에게는 결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인 것이지요.
반면에 불교에서는 중생과 부처를 둘이 아니라고 봅니다. 중생이 자신을 중생이라고 바라보기 때문에 중생인 것인지, 실상은 다 부처라는 인간관을 갖고 있습니다. 대표적 예가 앙굴리마라 이야기인데,,사람을 99명이나 죽였던 희대의 살인마였지만 한 생각을 돌이키면서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봐도 불교는 인간에 대해 열린 사고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근원은 악마새끼가 아닌 예수라는 게 불교적 인간관인 것이지요. 영화에서는 예수와 악마새끼를 동일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편인데 이런 관점은 불교적 관점에 가깝습니다.
〈피에타〉는 김기덕 감독의 18번째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습니 다. 우리 나라 영화역사상 최대의 쾌거라고 합니다. 그간 감독상은 여러 차례 받았지만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건 처음이고,
한국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영화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번 수상 이전부터 김기덕 감독은 세계적인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2004년에〈빈집〉과〈사마리아〉로 베니스영화제와 베를린 영화제에서 각각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2011년에는 〈아리랑〉으로 칸느 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김기덕 감독은 우리나라 영화인으로는 드물게 종교적 구원이라던가 인간본성의 탐구, 인간의 존재조건 등 철학적 문제에 천착해온 감독입니다. 그는 상징적 표현에 어려운 주제를 담아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외면 받았고, 또한 같은 이유로 세계 영화제에서 관심 받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영화〈피에타〉또한 김기덕 영화의 두 가지 특징인 상징적 표현과 종교적 철학적 주제에서'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영화는 청계천을 배경으로 합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사라지기 직전의 청계천입니다. 한때는 우리나라 산업의 엔진 역할을 했던 청계천이었지만 이제는 시효성을 다했기에 폐기 직전의 처량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쓰레기와 폐철이 무덤처럼 쌓여있는 좁은 골목과 기계가 멈춘 공간의 어두운 풍경은 음습하고 두려운 괴물의 입속과 닮았습니다. 생명체라고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배경의 청계천은 지옥의 이미지를 닮았습니다. 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자살을 하고 누군가는 손이 잘리고, 또 다리를 잃으면서 내지르는 누군가의 비명이 저주처럼 울려 퍼지는 공간입니다.
그러니까 영화의 배경은 지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옥에는 그에 걸맞게 지옥을 관할하는 자가 있어야겠지요. 그에게 필요한 건 눈물과 자비가 아니라 얼어붙은 심장과 냉철한 수행능력입니다. 주인공 강도(이정진)는 자신의 역할에 아주 열심입니다. 지옥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돈을 빌리고 안 갚는 사람들을 찾아가 손발을 잘라 불구자로 만드는 일입니다. 손발이 잘리면 보험금을 받게 되고, 그 보험금으로서 빚을 청산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채업자의 청부인인 것입니다. 그는 이 일을 하면서 조금도 마음의 동요를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의 손을 냉혹하게 절단기 아래에 밀어 넣는가 하면, 다리를 부러뜨리기 위해 높은 층에서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을 밀어버릴 수 있습니다. 정말로 유능한지옥의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강도를 저승사자 보듯 했으며, ‘악마새끼’라고 불렀습니다. 지옥에 참으로 걸맞은 사람이 강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옥 백성 강도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납니다. 여자는 자신을 강도의 엄마라고 우겼습니다. 어렸을 때 버려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지금까지 강도가 저지른 모든 잘못은 자신의 잘못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강도를 버렸기 때문에 정이 없이 외롭게 자랐기 때문에 강도가 지금처럼 냉혹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눈물로 사과를 합니다.
이 부분에서 감독의 인간관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크리스트교에서는 인간을 원죄를 지닌 태생부터 죄인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감독은 인간에게서 문제를 찾기 보댜는 자비롭지 않은 신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여기서는 강도의 잘못을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탓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실상은 인간에게 너그럽지 못한 신에게서 모든 죄의 근원을 확인하고 있음을 볼 수 있겠습니다. 인간에게 따뜻한 환경을 제공한다면 인간은 좌를 짓지 않고 선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영화는 이런 주장을 재확인하면서 진행됩니다. 강도의 어머니 미선(조민수)은 강도에게 매우 헌신적입니다. 강도를 위해 따뜻한 음식을 만들고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그간 모성을 경험하지 못했던 강도는 어머니에게 깊이 빠져듭니다. 그러면서 차갑게 굳어있던 심장도 조금씩 녹고 그는 이제 따뜻한 피가 도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살았던 ‘추심인’이라는 직업도 그만두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착한 사람으로 바뀐 강도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엄마의 출현으로 강도는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앞에서의 주장처럼 감독은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환경이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깝게는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모성의 결핍과 돈이 최고선 자리에 오른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지만 크게 보면 인간에게 지’비롭지 않은 신에 대한 원망이고, 사악한 운명에 대한 비난입니다. 결국은 인간에 대한 감독의 진한 연민이 엿보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선이 사라집니다. 사실 미선은 .강도의 엄마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강도로 인해 자식을 잃은 불쌍한 여자였고, 복수하기 위해 강도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슬픔을 똑같이 경험하게 하는게 복수의 방법이었습니다. 강도의 엄마인 척 하고, 강도가 엄마의 사랑을 느끼면서 엄마에게 집착하게 하고, 마침내 자신이 죽음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처절한 아픔을 느끼게 한다는 게 복수의 시나리오였습니다. 미선은 시나리오처럼 강도 앞에서 죽습니다.
미선을 통해 강도는 신의 사랑을 조금 맛보았지만 사'실 신의 사랑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에게 신은 부재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구원은 오직 자신에게 맡겨진 과업인지도 모릅니다. 영화의 곳곳에 ‘할렐루야는 영원하리라’는 글귀가 나타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신의 사랑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신의 사랑으로 착각했던 미선 또한 복수를 위한 거짓세계에 지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감독은 신의 사랑을 경험하면 인간은 선하게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결론에 이르러 그는 신의 존재나 사랑에 회의를 품은 모습을 보입니다. 신은 부재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 같습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은 지옥에서 그렇다면 인간의 구원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강도의 죽음, 앞서 미선의 죽음을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구원은 신이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몫이라는 걸 두 주인공은 죽음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또한 이런 죽음과 구원의 모습은 사뭇 불교적입니다.
비록 복수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지만 미선은 죽어가면서 강도에게 강한 연민을 느낍니다.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마음은 죽음의 순간에 자유로워졌습니다. “불쌍한 강도” 하면서 죽어가는미선의 마음에는 강도에 대한 미움 보다는 연민이 많았습니다. 사실은 강도뿐만 아니라 미선도 지옥 백성에 알맞은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를 해하면서 살아온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집요한 복수심이 삶의 원동력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복수심의 자리를 연민이 차지하면서 스스로 구원이 된 것입니다. 육신의 소멸을 통해 영혼은 구원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강도는 미선의 죽음으로 상처를 받았고, 사건의 전말을 깨닫고 자신의 죄를 참회합니다. 자신 때문에 불구가 된 채 비닐하우스에서 폐 인처럼 살아가고 . 있는 사람의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매달려 길에 피를 뿌리면서 죽어갑니다. 그 모습은〈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 돌덩이를 매단 채 산을 오르던 40대 남자의 모습하고 닮았습니다.
그간 강도는 육신을 위한 삶을 살아 왔었습니다. 사람들을 잔인하게 대했던 것도 결국은 육신의 보존을 위한, 살아남기 위한 이유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손을 자른 후 돌아오는 그의 손에는 생닭이 들려있거나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꿈틀거리면서 매달려있었습니다. 살아남고 싶다는 몸부림을 보이는 생명체처럼 강도 또한 그저 살아남는데 급급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오직 육신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강도는 그렇게 집착하던 육체를 과감히 버립니다. 육체에 대한 집착을 끊는다는 것은, 영혼의 재생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육체를 중심으로 한 삶을 버림으로써 자신을 구원하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을'구원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자신인 것입니다. ‘할렐루야는 영원하리라’는 글귀의 잦은 등장은, 원래의 의미 보다는 반어적 표현에 무게를 두여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은 신을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의미에서 풍자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실재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자신들이었으니까요 .
지옥 백성이었던 강도와 미선을 구제한 것은 신의 손길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였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자신의 구원은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게 영화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구원을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아마도 해탈일 것입니다. 무언가에 묶여있던 상태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크리스트교는 이 역할을 신에게 맡기지만 불교에서는 본인이 해결해야 할 과업으로 바라보는 편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인간에게 구원의 역할을 맡겼고, 주인공들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비록 형식은 크리스트교적 모습을 보이지만 깨달음은 불교에 가깝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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