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묘원구상과 사종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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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61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3-04-05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불교의 선정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화령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철학박사 중앙교육원장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1 08:17 조회 2,204회본문
관묘원구상과 사종위의
시신의 부정함을 관하는 방법은 상상력을 동원하기도 하 고 그림을 통하여 시신의 썩어가는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 고 실제로 시신을 앞에 놓고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 서 관법을 행한다. 남방불교에서는 생전에 미인이었던 여 자의 시신을 앞에 놓고 부패하여 백골이 남을 때까지 그것 을 관찰하면서 신체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는 수행을 하 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구도자들의 처절한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가 상상을 통해서 생각해 보더라도 시신이 썩어가는 모습은 실로 끔찍하기 짝이없을 것이다. 아무리 생전에 미인이었더라도 목숨이 다하고 아무도 가까 이 가고 싶어하지 않으며 쳐다보는 것은 물론 만지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을 때는 만지고 빨면서 거기에 집착하여 온갖 번뇌를 야기한다. 그러한 경 우에 시신을 앞에 놓고 수행한다면 그 효과는 실로 극적일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야 시신을 직접 앞에 놓고 그 부패상 황을 관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상상력을 동원하 여 육신의 부정함과 허무함을 관찰하는 것은 확실히 효과 가있을 것이다.
어쨌든 과거에는 그러한 방법을 써서 우리의 신체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려고 했으며 그러한 방법을 자세하게 묘사 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 대표적인 것이 묘원구상 이라고 하여 묘지의 시체에 대한 9가지 관찰을 통하여 신체 에 대한 싫어하는 마음을 내었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1.시신이 부풀어 오르고 푸르게 되며 흐물거리는 모습, 2.새나 짐승에게 물어뜯기는 모습, 3.피와 살이 엉켜 있는 모습, 4.살은 떨어져나가고 피가 묻어 있으며 근육이 걸쳐져 있는 해골의 모습, 5.피와 살이 없 이 근골만 걸쳐져 있는 모습, 6.해골이 흩어져 있는 모습, 7.해골이 하얗게 되어 있는 모습, 8.해골이 쌓여 있는 모습, 9.해골이 가루처럼 되어 있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 러한 끔찍한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혐오감이 드는데 시 신을 직접 앞에다 놓고 부패해서 해골이 가루가 될 때까지 쳐다본다고 생각해보라. 누구든지 우리 신체에 대한 혐오 감과 더불어 덧없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방법뿐만 아니라 시체의 부정을 관찰하기 위히여 더욱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먼저 팽창관이라고 하여 목숨이 떨어지면 시신이 곧 부패하여 부풀어 오르는 것을 관찰한다. 청어상이라고 하여 시 신이 점점 푸르게 변하는 것을 떠올린다. 농란상은 시신에서 고름과 같은 더러운 오물이 나오며 흐물흐물 썩 어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다. 참작이산상이 라고 하여 팔다리와 온몸이 찢어져 흐트러져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산란상이라고 하여 시체가 새나 기는 짐승 등에 의하여 쪼아먹히거나 물어뜯겨서 결국에는 뼈만 남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혈도상 은 시신에서 피고름이 흘러 나와 도처에 흩어져서 결국에는 뼈 대만 남는 것을 상상하는 방법이다. 충취상은 피고 름이 흘러나온 가운데에 구더기가 모여 있는 것을 상상한 다. 백골관은 처음에는 발바닥부터 시작하여 온몸의 피부 가 썩어 문드러져서 결국에는 백골만 남게 되는 것을 상상 하는 것으로 탐욕심을 다스리는 데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시신의 더러움과 덧없음을 관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과 타인의 몸에 대한 애 착을 끊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평정한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되며 바른 지혜를 닦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우리가 살아있으면서 평소에 우리의 몸을 돌보는 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몸은 수행의 도구 가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부정관을 통 하여 신체에 대한 혐오감만 기르고 신체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마구 다루거나 혹은 역으로 “죽으면 썩을 몸”으 로 생각하여 잘못된 쾌락에 집착한다면 이 또한 폐단이라 고할 것이다.
살아 있는 우리의 몸은 철저하게 수행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념처 수행의 사전 준비로서 네 가지 위의가 필요하다. 즉, 행-주-좌-와가 법도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일상의 모든 동작이 품위가 있으며 절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위의에 대하여《대념처경》에서는 부처님께서 “”라는 말을 강조하셨다. 즉, “걸을때는 내가 걷는다는 것을 알고, 일어설 때는 내가 일어선다는 것을 알고, 앉을 때는 내가 앉는 다는 것을 알고, 누울 때는 내가 눕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 이와 같이 여실히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 은 정념을 갖추고 정지로써 관찰하는 것이며 심지어 는 자는 중에도 멈추지 말고 행주좌와 어느 경우에든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이 것이 “분명히 앎”이라는 것이다.
어째서 이러한 ‘분명한 앎’이 필요한가? 일반적으로 걸을 때는 걷는 것을 생각하고 멈출 때는 멈춘다고 생각하는 것 이 뭐가 어려우냐고 할지도 모른다. 왜 이러한 것이 수행이 라고 불러야 하나 의심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는 마음과 몸이 따로 놀고 있다. 우리의 신체는 어떤 동작을 하던지 마음과 떨어져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 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행주좌와의 4종위의에 대한 분명한 관찰은 우리의 마음 이 몸에 선행하여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해주며 마 음의 긴장과 조급함을 해소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분명히 앎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동작은 법도에 맞게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는 무아와 무상이라는 것을 철저히 깨달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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