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모범적인 불교영화〈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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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63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3-06-01 신문면수 11면 카테고리 영화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은주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김은주〈자유기고가〉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5-31 10:47 조회 2,704회본문
가장 모범적인 불교영화〈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죽음, 빠진 이빨을 버리는 정도 의 퍼포먼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한국, 1989) 은 삶과 죽음의 의미를 불교적인 관점에서 침도있게 탐구하는 영화입니다. 마치 과학자가 현미경 렌즈를 통해 대상을 관찰 하듯 감독은 불교라는 렌즈를 통해 삶과 죽음이라는 현상 을 깊이 있게 파고들고 성과 있는 결과물을 내놓습니다. 또한 감독의 렌즈는 선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영화 는 엄밀하게 말하면 선승의 렌즈를 통해 현상계를 설명하 고 있으며, 인간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의 의 문에 대해서도 선불교의 입장을 빌어 명쾌하게 답을 제시 하는 편입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등장은 당시 한국 영 화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듣도 보도 못했던 신인 감독이 완전 새로우면서도 영화문법에 비추어 전혀 손색이 없는 영화를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80년대 는 김기덕도 홍상수도 나오지 않았던 시기로 우리나라 영 화가 해외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못 내고 있을 때인데 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제목 참 특별합니다. 의 미하는 게 무엇일까, 정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 엇일까, 하는 의문이 먼저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굉장히 궁금하지만 정답을 찾을 길 없어서 의심이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이런 걸 화두라고 하지요. 간화선에서 중심을 삼는 게 화두고, 영화는 화두의 형식을 빌어 제목을 달았 습니다.
이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염화미소’와 관련한 문장을 보여줍니다. 까만 화면에 ‘그는 진리를 묻는 제자 앞에 한 송이 꽃을 들어보였다.’는 하얀 문장이 선명하게 나타납 니다. 감독이 하고자 하는 얘기가 부처님께서 들어보였던 연꽃의 의미와 궤를 같이 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가섭 스 이 유일하게 그 의마를 알았던 것처럼 감독 또한 지신이 보여주는 영화의 의미를 관객이 알아채기를 기대한 장면 이면서 또한 영화가 현상계 이면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예 고이기도합니다.
화두라는 게 언어와 표현 너머의 소식으로, 이것은 현 상계를 뛰어넘을 때 밝혀질 수 있는 것으로서 화두는 현 상계의 부정에서 출발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상계에 발을 빼고 있는 사람에게 화두는 수월하게 풀리 는 수수께끼고, 현상계에 발을 깊게 묻고 있는 사람에겐 그야말로 깜깜한 소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용균 감독이 만든 이 영화〈달마가 동쪽으 로 간 까닭은?〉은 아주 새로운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 다. 현상계를 통해 현상계를 부정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 으니까요. 부처님께서 보여주었던 ‘염화미소’ 처럼 말이나 표현이 아니라 마음으로 전해야 할 것을 설 명하려는 새로운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은 도전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감독은 어려운 레이스를 성 공적으로 완주했습니다.
인물 구성을 살펴보면 두 부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토스님인 혜곡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자 나머지 둘 에 대해서 스승 역할을 히고, 또한 아쭈 행복한 세계에 머 무는 사람입니다. 해진 동자와 기봉스님은 노스님과 달 리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면서 이런 감정들을 해결하여 노스님의 자유자재한 행복의 세계로 가고자 하는 학생 신 분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어린 두 스님들이 수행과 배움을 거쳐 큰 스님의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주 골격입니다.
먼저 괴로운 사람이 괴로운 이유를 찾아내야 하고, 행 복한 사람은 행복한 이유를 찾아내야 합니다. 기봉스님 이 괴로운 이유는, 집에 두고 온 눈먼 어머니에 대한 걱정 과 근심 때문입니다. 물론 그는 눈 먼 어머니와 함께 살 때 도 괴로웠습니다. 생활의 무게와 알 수 없는 공허감 때문 에 그는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을 찾고자 절로 왔고, 마침 내 노스님 앞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은 쉽게 그리고 해진동자의 괴로움은 어느 날 새 한 마리를 잡아 오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계곡에서 수영을 하던 동자는 우연히 날아가는 새 한 쌍을 발견하게 되고, 동자는 무슨 마음에서인지 돌을 던져 새를 잡습니다. 돌에 맞아 다친 새를 절로 데려와 몰래 숨겨놓고 물도 주고 하면서 간호 를 하지만 새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습니다. 새가 죽자 동 자는 새를 기왓장 아래 숨겨둡니다. 혹시나 살아나지 않 을까, 하는 마음에서였겠지요. 그런데 어느 날 죽은 새의 시체에서 구더기가 바글바글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 모습 에서 동자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죽음을 체험한 동자에 게 현상계는 불안과 두려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습니 다. 그래서 밤에 오줌 누러 일어났다가 나무에서 울어대 는 새소리와 산짐승 소리에 잔득 겁을 먹고 도망가듯 방 으로 숨기도 하고, 큰스님 약사발을 들고 가다가도 새소 리에 놀라 도망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동자 주변에는 늘 새 한 마리가 쫓아다녔습니다. 동자가 죽인 새와 한 쌍을 이뤘던 새로 짝 잃은 새입니다. 동자에 대한 원한과 잃은 짝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동자 가 갖고 있는 죄의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걸 상 징하는 매개물입니다. 결국 동자는 새 한 마리를 갖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다가 이렇게 불편한 감정들을 무더기 로 껴안게 된 것입니다. 기봉스님이 집에 두고 온 노모에 대한 죄의식과 별로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절에 서 유일하게 행복한 사람인 노스님은 이들이 불행한 이유를 알고 있었고, 스승답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 었습니다.
어느 날 노스님은해진 스님이 버려진 자기 이빨을 찾아 내서 소중하게 움켜잡는 걸 보고는 “불쌍하다”고 말합니 다. 이빨을 움켜잡는 그 마음 때문에 앞으로 감당해야 할 고통이 노스님의 눈에는 보였기 때문에 나온 탄성이었습 니다. 그러면서 혜곡스님은 어린 해진 동자에게 그 이빨 이나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하나도 다를 게 없다고 타이릅니다. 사실은 전혀 다를 게 없는데, 이빨은 소중하 고 돌멩이는 나와 무관하다는 마음의 분별이 있을 뿐이라 는 말이었습니다.
해진스님이 버려진 이빨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모든 고통의 근원은 ‘자기’라는 소유욕에서 출발했 습니다. 해진스님의 이빨이 예전에 해진스님의 몸에 붙 어있을 때 해진스님의 것이었지만 이제 길에 버려졌는데 도 여전히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해진스님이나 기봉 스님이나 모두 몸을 자기라고 생각하는 데서 고통이 시작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빨이 수명이 다해 폐기되는 것처럼 이 몸도 그렇게 사라질 것인데 절대로 근본자신이 아닌데 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시작된 ‘이 몸이 바로 나’ 라는 생 각 때문에 자기라는 정체성이 생기고, 내가 있으니까 죽 는 걸 걱정하게 되고, 또 이 몸을 낳은 부모와 형제도 갖게 되고, 거기서 많은 소유욕이 생겨나고 애착이 생기고, 고 통이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영화는 혜곡스님의 죽음을 통해서 이빨 에피소드에서 보여주었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킵니다. 이빨이 버려지면서 길가의 돌멩이와 다름없여진 것처럼 육신 또 한 그런 운명이란 사실을 죽음이라는 화려한 퍼포먼스를 통해서 관객에게 확인시켜주었습니다 .
혜곡스님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아는 도인이었습니다. 동규에 걸린 살을 한 근이나 잘라낼 때도 웃을 수 있는 경 지, 육신에 대한 애착을 많이 끊어낸 경지에 이른 혜곡스 님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스님은 자 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제자인 기봉스님에게 죽음과 관 련한 당부를 상세하게 합니다. 자기가 죽으면 관으로는 반닫이를 쓰고, 입었던 옷 그대로 그 관에 넣어서 하루 밤 사이에 다 태워달라고 당부합니다. 그의 당부에는 몸에 대한 어떤 존중도 슬픔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수명이 다 한 이빨을 길가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듯이 쓸모가 없어 진 고기 덩어리를 처리하는 것 같은 담담함이 느껴지는 어조였습니다.
혜곡스님의 육신은 스님의 유언처럼 장작더미 속에서 밤 내내 타들어갑니다. 영화는 오랜 시간 육신이 불 속에 서 타는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이 이 속에 들어있으니까요. 혜곡 스님도 기봉스 님에게 자신의 죽음을 당부하면서 자신의 다비식이 제자 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활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하고 싶은 말은 육신이 사라져가는 과정을 직시 해서 그 허구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 였습니다.
육신은 결국 이렇게 불구덩이 속에서 타들어가고 한 줌의 재로 남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는 집 요하게 불길을 잡습니다. 그렇게 밤 내내 타들어간 육신 은 아침이 되자 재로 남습니다. 제대로 타지 못한 뼛조각 은 기봉스님이 다시 빻아서...가루로 만들었으니다. 이런 장면까지 리얼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를까, 싶지만 그렇 게 훌륭한 스님도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진다는걸 구체 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세부적인 묘사도 했던 것 같습니다. 마침내 완전한 재로 남은 혜곡스님의 육신은 기봉스님에 의해 뿌려집니다. 그 재는 물 속에 뿌려지고 바람에 날리고 숲속에 버려지고 하면서 흙의 양분이 되 고, 물고기 밥도 되고, 마침내 육신은 지수화뿡으로 돌아 갔습니다.
영화가 보여주려고 했던 가장 중요한 퍼포먼스이자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가 끝나고 과연 노스 님의 두 제자는 무엇을 배웠을까요? 노스님이 죽음을 통 해 보여주었던 활구를 통해 기봉스님과 해진스님은 성장 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또한 그들의 성장이 이 영 화의 중요한 대목입니다.
혜곡스님의 입적 후 기봉스님은 산을 내려갑니다. 해진 스님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봅니 다. 뜬구름에게서는,어디든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자신 또한 그렇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소와 함께 떠나갑니다. 여기서 소는 불성을 의미합니다. 불 속에 들 어가더라도 꽉 깨문 화두를 뱉어서는 안 된다는 혜곡스님 의 당부처럼 그가 어느 곳에 있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중요한 것은 화두를 늘 챙겨서 불성과 함께 사는 것을 의 미합니다. 그러니까 기봉스님은 스승의 죽음을 통해 불성 소 에 더욱 다가간 삶을 살게 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진스님은 절에 남습니다. 아직 어리지만 그는 여법하게 예불을 올립니다. 그리고 해진스님을 맴돌던 짝 잃은 새는 떠나깁니다. 이는 해진 스님이 새의 죽음을 통 해서 갖게 됐던, 불안과 두려움, 애착, 죄의식 등의 감정으 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 든 그 또한 쓸데없는 감정을 극복하고 수행자의 삶을 살 게 될 것을 알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도 이 영화를 통해 기봉스님과 해진동자처 럼 한 단계 의식이 확장된 경험을 했습니다. 삶이라는 건 이빨이 입 속에서 제 역할을 하는 정도고, 죽음이란 빠진 이빨이 버려지는 것 정도의 차이 밖에는 없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빨이 한때는 내 컷이었지만 어느 순간 무 관한 물건이 돼버리는 것처럼 우리의 육신 또한 그런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본 후 다른 의문이 남았습니다. ‘이 몸이 흙과 물과 바람으로 허공중에 흩어지고 나면 나의 주인공은 어디로 가는가?’ 라는 화두를 하나 챙기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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