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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광흥사, 환처를 위해 『훈민정음해례본 영 인본』복장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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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67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3-10-05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전시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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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5-29 12:00 조회 2,8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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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광흥사, 환처를 위해 『훈민정음해례본 영 인본』복장 봉안

2013년 10월 9일 10시 30분에 안동 학가산 광 흥사(주지 범종)에서 567돌 한글날을 기념하고 현재 은닉되어 있는 훈민정음해례본 상주본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도록 기원하는 법회가 열 린다.

훈민정음해례본은 한글창제의 의의와 제자 원리를 풀어쓴 해설서로서 그 가치는 무가지보의 위대한 유산이다.

안동 광흥사(대한불교 조계종 제 16교구)는 지난 해 훈민정음해례본의 상주본이 도굴된 곳 이라고 재판과정 중에 판결이 나면서 새로운 소 유권자로 주목받은 사찰이다. 국가에 소유권을 기증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되었지만 실물 인 훈민정음해례본은 아직 실체를 드러내지 않 고 있다.

광흥사 주지 범종스님은 훈민정음해례본 상 주본이 광흥사 명부전 시왕님의 복장물이였다 는 근거에 입각하여 한글 창제 과정에 불교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천명 하고, 현재 국가로 환원되고 있지 않은 훈민정 음해례본의 환처를 위해 이번 영인본 봉안 법회 를 개최하는 입장을 밝힌다.

이 날 법회및행사는『훈민정음해례본 영인본』을 원래 안치되어 있던 광흥사 명부전 시왕 님 복장에 봉안하는 점안 법회로 열린다.

그리고 훈민정음해례본 간행 불사 동참자에 게 영인본 1권씩을 나눠주고 지금까지 광흥사에 서 검토하고 수집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세간에 소개되지 않았던 불교가 한글 창제 과정에 주역 을 했다는 근거가 되는 신미대사의『원각선종 석보 (1438년 간행)』영인본을 전 시하여 참석자들이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이번 한글날 행사는 내년 2014년 한글날에 개 최되는『훈민정음해례본』학술세미나와 연계 하여 진행되고 있다.

한편 안동 광흥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신 천년고찰로서 불교 중흥기 고려시대 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원당이였던 사찰 이다. 1827년 화재로 시왕전과 일주문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된 후 1827년의 광흥사중건사적기 의 중수기에 따르면 500여간에 이르는전각이 있었던 영남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였 다. 어필각에는 세종대왕의 친서인 수사금자법 화경과 영조대왕의 친서인 대병풍 16첩과 어필 족자 1점과 왕실의 어필, 어시 등의 다양한 유묵 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1952년 11월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 실린 기 사에 따르면 영주 희방사와 안동 광흥사에 보관 중이던 훈민정음과 월인석보의 원 판목이 전쟁 중불에타버렸다.

판목의 수는 월인석보가 222장, 훈민정음은 400여장이 넘는다. 또 이보다 20여 년 전인 1929 년 동아일보 신문 기사도 희방사와 광흥사가 소 유한 월인석보 판목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다. 

1946년 또 다시 대웅전이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1954년 극락전과 1962년 학서루와 큰방이 낡아 서 무너졌으며, 지금은 응진전( 문화재 제165 호)과 명부전이 남아 있다. 2012년 2월 9일 대구 지방법원 상주지 원 선고공판에서 훈민정음해례 본을 광흥사 복장 유물에서 도굴하였다는 증언 이 나왔다.

또 한글 창제 과정의 핵심 역할을 한 분으로 신미대사와 학조대사를 꼽을 수 있는데 학조대 사는 풍산읍 소산리 출신으로 광흥사로 출가하 신 분이다. 국보 70호 훈민정음해례본 간송본이 안동에서 발견된 것과 희방사 판본에 대한 기사 들을 유추하여 보면 광흥사에서 훈민정음 해례 본 판본을 만들어 인쇄하여 복장에 봉안하였다 고추정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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