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도 조선촌 천인갱 합동 추모법회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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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69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3-12-05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한중일 대회 특집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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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5-26 12:18 조회 2,316회본문
전쟁이 끝나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외로운 고혼들.
중국 해남성 산야시 난딩촌에 위치한 조선촌 천인갱 합동추모법회가 11월 25일 봉행되었다. 사전 계획에는 한국 대표단 전원이 참가하는 위령제를 봉행 할 예정이었으나 중국 당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한국대표단은 각 종단 대표와 취재 기자 등 총 30명에 한해 출입 허락을 중국당국으로부터 받았다.
현장에 도착한 대표단은 높게 자란 풀숲을 뚫고 기념 비 앞에 설 수있었다. 종단협의회 부회장 태고종 총무원장 도산 스님, 천태종 총무원장 도정스님, 총지종 통리원장 법등 정사등 각 종단대표와 취재기자5명이 동참한 추모법회는 종단협 사무총장 홍파스님의 집공으로 열렸다. 반야심경 봉독, 축원, 태고종 총무원장 도산스님과 천태종 총무원장 도정스님, 유가족 대표 이강희 여사와 한광수씨의 헌화가 이어졌다.
청수에 이어 1943년 강제 징용되어 조선보국대로 해남도 삼아시 능수비행장 건설현장에서 22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고 한기석씨의 장남 한광수씨의 추모사가 낭독 되었다.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하고 이승과의 연올 다하신 부친에 대한 절절한 사연과 평생을 남편대신 아들을 바라보며 살아온 노부인의 사연이 참가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법성계 독송을 끝으로 법회를 모두마키고. 동참한 대표단은 천인갱 주변을 돌며 희생자들의 극락왕생을 서원했다.
해남도 조선촌 천인갱이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자는 최대 600만명 (일본으로 끌려간 137만명. 한국내에서 강제노동에 동원된 430만명. 군인. 군속. 위안부가 37만명)의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해남도를 침략한 일제는 군수품 생산을 위한 자원약탈과 군사 시설물 건설을 위해 조선과 대만, 중국 상해, 복건, 홍콩과 영국 및 오세아니아병사 포로 등 2만 명의 징용자를 끌고 와 강제 노역을 시켰으며, 해남도 현지인들 또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지금의 삼아시의 관문안 삼아공황 활주로나, 중심도로인 중산로 또한 조선인 징용자들의 강제노역으로 만들어진 길이다.
해남도 전체 강제징용자 2만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중 조선인이 몇 명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1941년 19살 나이에 일반징용자로 끌려왔다 탈출하여 해남도 산 속에서 살다 1946년 국민당의 도움으로 귀국했던 장달웅(켈리포니아 거주)씨의 증언에 의하면 “석록철광에만 1천명의 조선인징용자가 채광작업에 동원되었으며, 탈출하려던 동포들이 처형되었다. 해남도에는 우리 말고도 조선에서 끌려온 강제징용자들이 많았다” 고 한다. 조선인 징용자 중에서도 수형자로 구성된 조선보국대 2,000명과 조선인 일반 징용자가 수천이라고 헤아릴 뿐 정확한 숫자는 좀 더 많은 연구조사가 진행되어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조선보국대는 일제강점기아래 전국의 교도소에 수감되어있던 수형자들을 감형을 조건으로 선발하여 해남도로 강제 징용한 사례이다. 이들은 일반 징용자와 확실히 구분되는 파란 반소매 상의 뒤에 -조선보국대-라고 쓰고 2명이 한조가 되어 쇠사슬에로 연결돼 끌려왔다.이들은 일반 징용자와 현지인들과의 접촉이 철저히 차단되었고.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전쟁이 끝나자 일본군은 조선인 보국대를 집단적으로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렁.다. 일본군의「귀환보고서」에는 조선보국대 소속 조선인은 658명만이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는지 조선촌에서 학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동안의 조사와 현장 증언을 토대로 파악 된 것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한 뒤 현 난딩촌 부근 기슭에서 일본군들의 만행을 은폐하고자 천인갱 구덩이를 파고 일본도로 참수하거나 휘발유로 불태우는 등 수 백명을 집단학살하여 암매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2001년 1월 재미교포 서재홍씨가 천인갱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사재를 털어 비석을 세우고, 당시 조계종 사회부장 양산스님께 요청하여 불국사 말사 스님 등 18명이 처음으로 천인갱에서 천도재를 봉행했다. 당시 천인갱 일부를 발굴하여 약 109위의 유골을 수습하였고 근처 납골당을 세워 안치하였다. 이후 성역화를 추진하였으나 사업은 중단되고 천인갱은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지금은 삼아시의 적극적인 건설 개발로 천인갱 인근에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위기에 처해있다.
중국 당국은 이곳에서 발굴된 유골이 조선인이라는 과학적 근거가 있느냐는 논리로 이번 합동위령제를 불허했다. 이는 양국의 호우 협력 관계에 지대한 영항을 미치는 일로 중국 당국의 전향적인 자세변화가 필요하다. 또한 정부는 민간단체의 노력을 적극 지원하며 외교적인 방안을 강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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