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념처 - 느낌으로부터의 해탈 애는 모든 괴로움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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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66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3-09-03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불교의 선정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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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5-29 12:53 조회 2,736회본문
수념처 - 느낌으로부터의 해탈 애는 모든 괴로움의 근원
수행자가 수념처를 닦을 때는 마음을 집중하여 지속적으로 느낌의 변화과 정을 관찰하여야 하는데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느낌을 여실하게 알 도록 해야 하며 정확하게 파악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 낌이 좋을 때는 좋다고 알아차리고 불쾌할 때는 불쾌하다고 알아차리며 느낌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을 때는 역시 그렇다고 알아차려야 한다.
느낌을 관찰할 때는 일어나는 느낌의 성질-가려운 것인지 아픈 것이지 등등- 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하며 동시에 느낌에 따른 감정도 분명하게 살 필 수 있어야 한다. 즉,일어나는 느낌에 대해 좋아하는 감정인지 싫어하는 감정 인지도 잘 살펴야 한다는 의미이다. 수념처를 닦는 수행자가 여실하게 관찰하고 여실하게 알아차리는 과정을 통하여 느낌의 참된 모습을 파악하게 되고 그럼으 로써 느낌 그 자체를 초월할 수 있게 된다. 느낌의 초월, 이것이 법락이며 수념처 수행의 목표이다.
모든 느낌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시각각 변하는 무상한 것임에도 여기에 집착하고 탐하는 마음을 내기 때문에 느낌은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괴로움을 초월하려면 느낌을 컨트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느낌 이 일어나고 한 동안 지속되었다가 이윽고는 사라지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 볼수있어야한다.
또한 어떤 느낌이 일어났을 때 그 느낌이 주는 감정면도 세심히 살필 수 있어 야 그러한 느낌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 누구든지 좋은 느낌은 자꾸 취하려 고 하고 싫은 느낌은 자꾸 피하려고 한다. 그러한 것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안달하고 화를 내게 된다. 우리는 눈으로는 좋은 것을 보려하고 귀로는 좋은 소리를 들으려고 하고 코로는 좋은 냄새를 맡으려고 하며 혀로는 맛있는 것 을 취하고 몸으로는 좋은 느낌을 느끼려고 히며 마음을 통하여 흡족함을 느끼려 고 한다. 이것이 마음과 몸뚱이를 지닌 우리의 숙명이다.
우리의 생활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육근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좋은 느낌을 취 하려는 투쟁의 연속이다. 생산활동, 경제활동이란 것도 실운 모두 육근을 만족시 키기 위한 것이다. 예술활동이나 문화활동도 모두 육근을 통한 우리의 만족감을 늘리기 위한 것이다.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는 것도 실은 육근을 만족시키기 위 한 것이다. 육근을 통하여 만족감을 누리는 것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지만 느낌 에 휘둘리어 좋은 느낌만 가지려 하고 싫은 느낌은 배척하려는 의도가 극심해질 때는 우선 자기 내면부터 집착과 증오로 혼란스러워지고 괴로워지며 그것이 바 꺝으로 확대되어 그러한 대상을 놓고 갈등이 있게 된다.
개인 간의 갈등이나 민족 간의 전쟁도 그 뿌리에는 모두 이러한느낌의 소유와 배척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느낌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 느낌에 과도하게 휘둘릴 때는 괴로움이 일어난다. 그것은 자기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확 대 재생산 되어 세계 전쟁으로까지 확대된다. 인간의 욕망의 근원은 좋은 느낌 을 많이 누리려는 쾌락의 추구에 있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렇기 때 문에 불교에서는 느낌을 제어하여 느낌의 포로가 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느낌의 생멸변화와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수념처를 통하여 무상과 무아, 공성을 깨닫는 것
사념처 수행자는 신념처를 닦을 때 미세한 느낌까지도 분명하게 알아차리며 느 낌에 수반한 감정까지도 객관적으로 면밀하게 관찰하여 느낌의 무상, 느낌의 무 아와 공성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느낌이 일어났다가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과정 에서 그 느낌에 대한 좋고 나쁨의 감정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잘 살필 수 있을 때에 느낌이 가져오는 모든 번뇌,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해탈 은 이러한 것을 말한다. 느낌으로부터의 해탈을 위해서는 그 느낌의 인연생멸과 찰나생멸도 알아차려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될 때에 신념처의 지혜가 바 로 서고 법념처의 수행과 결합하여 느낌을 초월하고 무명을 벗어나며 ‘나’라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오온을 초탈하게 된다. 나아가서는 오온에 대해서 뿐만 아니 라 세간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수념처의 수행이 단지 좋은 느낌, 나쁜 느낌을 구분하여 느끼는 것에만 그쳐서 는 안되며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느낌의 생멸무상을 분명하게 알아야 수념 처 수행을 제대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느낌이 일어날 때는 그 느낌을 바라보며 어떻게 일어났다 사라지는가를 정념 으로써 살핀다. 그리고 그 느낌은 어떤 감정을 주는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그 렇게 하면 느낌은 그저 하염없이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며 고정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느낌은 그저 인연생기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이며 거기에는 느낌이 일 어나는 대상도 느낌이 깃드는 의지처도 없으며 단지 인연 따라 일어나고 소멸되 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느낌은 있으되 느끼는 사람은 없고 감정은 있으되 감정을 지니는 사람이 없으며 알아차림은 있으되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는 경지 를 의미한다.
단지 느낌의 변화를 정념으로써 바라볼 뿐이며 거기에 집착할 필요는 없 다. 마치 호수에 물결이 바람 따라 일어났다 다시 잠잠해 지는 것처럼 그저 바라보 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서 바라보는 사람은 없는 경지이다. 이것이 수념처 수행의 핵심이다. 그저 바라보라. 느낌이 어떻게 일어나고 지속되다가 사라지는가를, 그 리고 그러한 느낌은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어떻게 마음이 따라 움직이는가를. 놓치지 않고 바라보라. 그럼으로써 무상과 무아, 공을 깨닫고 모든 괴로움의 근원 을 제거하여 해탈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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