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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빙 시대의 웰 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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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76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4-07-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오피니언 / 칼럼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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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용우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자유기고가 김용우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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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5-24 13:23 조회 2,8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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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빙 시대의 웰 다잉
웰다잉을 위해 내면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정신적인 투자도 해나가야 할 것이다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의 국가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다. 국민 3명 중 1명은 1년 이내 자살을 생각해봤고 10명 중 3명은 우울증을 갖고 있다고 한다. 유명인의 자살에서부터 일반 국민들이 자살 소식이 끊이지 않는 요즘, 과연 '잘 죽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웰빙시대에 웰다잉에 대한 생각이 아이러니라 할지라도,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명약관화한 명제 앞에서라면 삶을 구원하고자하는 불교적 웰다잉에 대해서도 불자라면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사실 웰다잉이 웰빙과는 대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하고 잘 사는 것이 또한 잘 죽는 길이라는 의미에서 웰빙과 웰다잉은 인과의 관계처럼 서로 보완하고 상통하는 개념 이다.

우리는 죽음보다 행복한 삶, 건강한 삶만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행복한 죽음, 건강한 죽음이란 말도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그가 세속적으로 아무리 행복하게 살았을지라도, 그가 진정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참된 의미에서 행복이란 바로 죽음에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열반에 대해 다룬〈대열반경〉을 살펴보면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석가모니부처님의 태도는 한마디로 "깨어 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육신의 노쇠, 질병, 죽음을 초연하고 평정하게 대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처럼 석가모니부처 님도 부모로부터 인간의 육신을 지니게 되었으므로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는 자신의 신체를 오래된 집에 비유하고 있다. 세월이 지나면 집은 낡아 마침내 허물어지고 말듯이 육신도 시간의 진행에 따라 노화되어

결국 죽게 된다. 그런데 그 집을 지탱하고 있던 대지는 여전히 계속되듯이 부처님의 육신은 허물어지고 말지만 마음은 대지와 같이 안정되어 있다고〈대열반경〉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범부들은 육신을 '나여0또는 '나의 것'으로 여기며 애착한다. 불가에서는 죽는 것을 '몸 벗는다' 혹은 '몸 바꾼다'고 말한다. 한평생 쓰던 몸뚱이를 벗어놓고 다른 몸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보자면 죽음이란 그 자체로서 기뻐할 일도 아니며, 통탄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어떤 삶을 살다가 죽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마음에 맞추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기 때문이다. 몸뚱이는 옷 갈아입듯이 갈아입을 수 있지만 마음은 그대로 가져가야 하는 것이다. 닦았으면 닦은 대로, 못 닦았으면 못 닦은 대로, 업장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본생경〉에서도 "친지의 죽음은 곧 우리들 자신의 한 부분의 죽음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들 차례에 대한 예행연습이며 현재의 삶에 대한 반성이다. 삶은 불확실한 인생의 과정이지만 죽음만은 틀림없는 인생의 매듭이기 때문에 보다 엄숙할 수밖에 없다. 삶에는 한두 차례 시행착오가 용납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에는 그럴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그러니 잘 축는 일은 바로 잘 사는 일과 직결되어 있다."고 했다.

결국 불자라면 열심히 선업을 쌓고 기도 염불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잘 사는 것이 되고 결국 잘 죽게 되는 것이겠지만, 물질만능의 시대에 우리는 우리 내면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웰다잉을 위해 내면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정신적인 투자도 해나가야 할 것이다. 웰빙의 참뜻은 웰다잉에 있으므로, 이제 우리는 웰빙을 삶의 문제에만 한정시킬 게 아니라 웰다잉에까지 확대해야 할 것이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 이치에 맞지 않고 물질과 악업에 끄달려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면, 생명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 걸쳐 있는 우리의 삶마저도 제대로 인간답게 산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범부와 달리 생사에 얽매이지 않았던 ,부처님도 그러한 것을 경계하셨다.

이미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구제되었으며, 이미 부처님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모른 채 오탁악세를 만들며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는 모두 부처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 사바세계에 오신 것이다. 잘 죽는 것, 그리고 잘 사는 것,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러한 가르침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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