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 중에는 만족을 알고, 달리 바라는 바를 내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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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2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05-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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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05-02 15:46 조회 1,680회본문
정진 중에는 만족을 알고, 달리 바라는 바를 내지 말아야 한다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손순표는 트럭에 실려 북으로 옮겨졌다. 짐칸을 가린 천막 사이로 얼핏 보이는 것은 낙동강. 그리고 어린 시절 뛰어 놀던 고향집 앞의 강가 백사장이 보였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심사가 차분해지고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영천수용소, 미군 명칭 ‘시아이 캠프4’는 1952년 8월 급조하여 시설이 열악했다. 그래도 영천행이 결정된 포로들은 북으로 송환될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가 있었다. 휴전협정의 조인이 남아 있지만, 영천의 포로들은 남쪽에 남을 수 있다는 소문이 수용소 안을 떠돌았다. 거제도에 비하면 감시도 덜했고 밤이면 숨죽일 수밖에 없었던 정치학습과 사상 선동도 이곳에서는 없었다. 배급사정도 나아졌다. 그야말로 전쟁 통에 두 번째 사선을 넘긴 것이다. 영천수용소는 어느 정도 자유가 보장된 곳이었다. 포로 감시에 나선 국군 헌병들도 포로들의 행동을 어느 정도 묵인하고 있었다. 남쪽 출신이거나 남쪽을 택한 포로들이었기 때문이다. 눈치껏 바깥으로 편지를 보내거나 철조망 밖 행인들과 대화하는 것 정도는 딱히 제재하지 않았다.
손순표는 옷을 찢어 자신의 이름과 집 주소를 적어 돌멩이에 싸서 철조망 밖 행인을 향해 던졌다. 포로 감시를 위해 경계를 서던 헌병도, 길을 가던 행인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행인은 고맙게도 그 주소에 적힌 밀양 집으로 아들 손순표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때가 대성사가 기도를 시작한 49일째 되던 날이다. 대성사는 후일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이들을 위해 이와 같은 법문을 남겼다.
“자식 잘 되기를 서원하거나 생산하기를 서원하는 정기 불공 중에는 특히 계행을 지켜야 서원을 성취한다. 만약 계행을 범하면 불공 중에 마장만 일어나고 공덕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실로 당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가르침이다. 자신의 자식을 위해, 모든 생명을 어버이가 된 마음으로 해치지 않고, 지키고 삼가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할 때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길 가는 행인에 의해 외아들의 소식을 듣게 된 대성사는 한걸음으로 영천 포로수용소로 달려갔다. 포로의 면회는 금지돼 있었고, 멀리서조차도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살아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성사는 잠 못 드는 밤을 끝낼 수 있었다.
“나무 관세음보살……”
대성사는 계속 정근을 그치지 않고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포로가 풀려났다는 소문이 들리면 밀양에서 영천까지 한달음에 달려가기를 무려 일곱 번을 했다. 기대하고 갔어도 소문은 소문으로 그칠 뿐 포로수용소의 문은 열릴 기미가 없
었다. 그때마다 살이 타고 피가 마르는 심정을 느꼈지만, 이미 마음속에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삼천대천세계의 불보살이 감응한다는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의 가르침은 이미 경전 속 구절이 아니라 법계를 통해 보여주는 바가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대성사는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에게도 산 생명 하나라도 해치지 말 것을 당부하고, 부정한 것은 멀리하며 오직 덕을 쌓아 조금이라도 남의 원망을 사지 말라고 강조했다. 바라는 바가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기도는 절실해야 하고 자신과 주변을 더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캄캄한 밤 어둠을 밝힐 등불 하나를 겨우 밝힌 셈이니 그 불꽃이 더욱더 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람을 막고 기름을 부어야 했다. 행과 불행은 예고 없이 닥쳐오는 법이다. 대성사는 오직 불행한 결과가 오지 않도록 애쓰는 일밖에 달리 할 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포로수용소 쪽에 어떤 기미가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대성사는 만사를 제쳐두고 영천까지 달려갔다. 오직 일념으로 법계의 보살핌이 있기만을 기대하면서 관세음보살 외우기를 진심으로 다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북으로 송환된다면 어쩔 것인가 불안은 점점 닥쳐왔고, 집안 주변 사람들도 체념하는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그래도 생사라도 알았으니 이젠 이쯤하고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런 소리를 들으면 서운한 마음이 들고 원망의 대꾸를 할만도 했지만 대성사는 묵연하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스스로 세운 신념이 있다면 세상의 변고에도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은 타고난 성품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소원을 이룰 것이며 어떻게 마음속 심지를 바르게 세워 흔들리지 않고 나갈 것인지. 정진에 대한 경험은 이때 다 한 것이라 후일 무엇인가 성취를 위해 정진할 것에 대해 직접 말씀을 남기신 바 있다.
“정진 중에는 만족을 알고 달리 바라는 바를 내지 말아야 한다. 마음속에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일으키지 말아 늘 참고 편안하게 머물러야 할 것이다. 인과를 깊이 믿어야 한다.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삿된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오직 착한 행실만 하고 악한 일은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
이런 가르침 그대로 누가 와서 아들의 생사와 운명에 대해 왈가왈부해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 더 덕을 베풀고 이 위기의 순간이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전쟁 중 집을 잃은 이나 피난민을 보면 아낌없이 도왔다.
1953년 6월 18일 운명의 날이 왔다. 자정 무렵 부산, 논산, 광주, 마산 등의 수용소에서 갑작스런 반공포로 석방이 일어났다. 남측의 결단으로 유엔군 몰래 남쪽 잔류 포로들의 석방이 결정됐고, 헌병의 언질로 미리 철조망을 끊어놓았다가 신호에 따라 모든 포로들의 탈출이 이루어졌다. 남쪽에 연고가 있던 이들은 밤새 달리고 달려서 집으로 가거나 숨어들었고, 이 소식은 밀양에도 전해졌다. 신문과 라디오 방송 전체에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뉴스로 뒤덮였다. 대성사는 한달음에 영천으로 달려갔지만 포로수용소 문은 열리지 않았고 오히려 미군 탱크 30여 대가 수용소를 포위하여 경비는 더 삼엄해졌다. 포로 석방의 낌새를 눈치 챈 미군은 영천포로수용소의 병력을 증강하고 국군과 전투를 불사할 정도로 강하게 반발했다. 실망 끝에 발걸음을 돌려야 했지만 이제 곧 좋은 소식이 있으리라는 강한 믿음이 생겼다. 수용소 주변에서 만난 국군
의 석방에 대한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결국 20일 밤 국군은 함께 근무하던 미군 경비병을 묶고 탱크를 무력화시키는 작전을 벌였다. 일제 사격을 하여 수용소 내 모든 전등을 깨뜨리고 수용소 문을 열어 포로들에게 무조건 뛰라고 등을 떠밀었다. 수용소 주변을 벗어나자 군인과 경찰이 포로를 서넛씩 분리하여 민가에 숨겼다. 주민들이 내놓은 밤참을 허겁지겁 먹고 포로 옷을 민간 옷으로 갈아입은 후 밤이 새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그 어느 때보다 길고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날 긴박한 작전 끝에 풀려난 영천수용소의 포로는 모두 8,000여 명. 대부분 남측 출신 포로였고 북으로 귀환을 거부한 인민군도 있었다. 영천에는 포로 외에도 그 배가 넘는 피난민과 민간 억류자들도 붙들려 있었는데 이들도 훗날 무사히 석방된다. 손순표는 영천의 지인을 통해 집으로 풀려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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