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이라는 울명에 갇힌 불쌍한 존재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 <동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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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83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5-02-09 신문면수 11면 카테고리 영화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은주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자유기고가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5-23 03:11 조회 3,042회본문
욕망, 이라는 울명에 갇힌 불쌍한 존재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 <동승>
〈동승〉의 마지막 장면은 지금까지 본 불교영화 중 가장 인상 적인 엔딩 씬이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동자승은 바랑을 짊어지 고 절을 나옵니다. 절에서 나온 동자승을 기다리는 것은 눈보라 휘몰아치는 들판이 었습니다. 높이 쌓인 눈 때문에 발이 푹푹 빠 지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길을 동자승 혼자 까마득하게 걸어가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고단하고 외로운 운명을 표현하는 엔딩이 었다고 봅니다. 대부 분 불교 영화들이 결국에 가서 주인공들은 욕망을 극복하는데 반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욕망에 대한 집요함 때문에 고통스런 현실에 던져지면서 영화가 끝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중생을 대변하는 두 개의 단어를 고르라면 ‘욕망’과 ‘고’일 텐 데 인간의 이 운명을 가장 적절하게 보여준 엔딩 씬이었습니다. 영화에서 동자승은 중생을 대변합니다. 헛된 욕망인데도 불구하 고 결코 그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동자승의 모습은 욕계를 사는 중생의 삶과 닮았고, 슬픈 운명을 예고합니다.
그런데 영화의 온도는 대체로 따뜻합니다. 욕망에 집착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탓하기 보다는 헛된 욕망인줄 알면서도 거기 서 헤맬 수밖에 없는 처지에 안타까운 시선을보냅니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동자승을 불쌍하게 여기고 따뜻하게 감싸 안는 인수 아버지의 모습은 영화의 지향점이기도 합니다.
〈동승〉(한국, 2002)의 원작은 함세익 이라는 극작가가 쓴 같 은 제목의 희곡입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연대는 1939년으로 우 리나라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힘들던 시절입니다. 이때 작가는 금강산 어느 사찰에 놀러 갔다가 사미승을 만났고, 이 만 남에서 영감을 얻어〈동승〉을 썼다고 합니다. 함세익의 희곡〈 동승〉은 1949년에〈마음의 고향〉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가 주경중 감독에 의해〈동승〉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된 것입 니다.
영화는 암자를 배경으로 해서 동자승과 큰스님, 그리고 사춘 기를 막 벗은 젊은 스님이 나오고, 인수 아버지라고 허드렛일을 하는 부목이 있습니다. 인물 구성 면에서 보면 대체로 동자승과 젊은 스님을 한 그룹으로 볼 수 있고, 큰스님과 부목을 같은 그 룹으로 무리 지을 수 있습니다. 앞의 젊은 그룹은 욕망을 갖고 있는 존재들이고, 뒤의 그룹은 욕망을 초월한 집단으로 앞 그룹 에 대해서 조력자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조력자 그룹인 큰 스님 과 인수 아버지는 역할 면에서는 동질적이지만 뚜렷한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큰스님에게는 자신의 틀이 있습니다. 이 틀은 불교적 가치관 을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세속의 삶은 고통스런 것이니 그것에 마음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큰 스님은 동자승이 욕망으 로 가득한 세속의 삶에 빠지는 걸 경계하면서 한 편으로는 수행 자의 틀 안에 동자승을 가두려고 합니다.
반면에 인수 아버지의 시선은 동자승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봅 니다. 동자승이 괴로워하면 더불어 괴로워하고, 동자승이 기뻐 하면 자신도 기뻐하고, 동자승이 원하는 건 자신도 소원하는 편 입니다. 교육자의 역할보다는 엄마 역할에 가깝습니다. 중생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을 가진 관세음보살곽 같은 존재로서 그의 행동 기준은 휴머니즘입니다.
어린 동자승이엄마를 그리워하자 부목은 어린 동자승의마음 을 이해하고 비록 거짓이긴 하지만 동치첳에게 희망을 줍히다. 단풍나무에 금을 그어 키가 그만큼 자라면 엄마가 온다고 일러 줍니다. 동자승은 그 희망을 갖고 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갑니다.
반면에 큰스님은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 다. 그 마음 때문에 동자승이 괴로움에 빠질 걸 알기 때문에 큰 스님은 그 마음을 헤아려주기 보다는 단칼에 끊어버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 타령 좀 그만하라고 나무라면서 스 님 나름의 처방을 내립니다. 나무 아래 앉아 바위를 바라보면서 바위가 마음속에 있는지 마음 밖에 있는 것인지 알아보라고 합 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또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준 처방이지만 배 아픈 사람에게 두통약을 주는 것처럼 동자승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물론 인간이 처한 욕망과 고통의 근본적 해결이라는 틀에서 봤을 때는 큰 스님의 태도가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큰 스님이 만든 울타리는 욕망에 들뜬 어린 승려에게는 너무 갑 갑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여타의 불교 영화들에 나오는 승려들 은 종교적 인 사람들이 었지만 여 기 나오는 젊은 스님과 동자승은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고 환속한 사람들입니다. 기질적으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성향의 사람들에게 건조한 가르침 이나 장벽 높은 계율은 어울리 지 않는 울타리 였습 니다.
동자승에게는 가르침을 주는 사람보다는 결여감을 채워줄 따 뜻한 엄마 같은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인수 아버지는 동자승에 게 이런 역할을 했습니다.
절에 오는 보살님 중에 동자승이 특히 엄마처럼 여기는 보살 이 있는데 그 보살이 두른 하얀 털 목도리를 보고나서 동자승은 자신도 엄마를 만나면 그 털목도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보살 이 둘렀던 털목도리는 욕망의 중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털 목도리를 보지 않았다면 동자승은 토끼를 잡고 그 가죽을 벗길 생각을 못했을 텐데 동자승은 어느 날 그 털목도리를 봐버렸고, 그래서 토끼를 한마리씩 잡아 살생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만 큰 스님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부목은 자신이 토끼 덫을 놓았고, 동자승에게는 잘못이 없다 면서 대신 죄를 덮어씁니다. 부목은 동자승의 잘잘못을 판단하 기 보다는 혼날 걸 걱정하면서 괴로워하는 동자승을 도와주는 쪽을 택했습니다. 엄마에 대한 욕망 때문에 동자승이 살생을 저 질렀다는 걸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헛된 욕망에 빠져 허우적거 리는 동자승이 부목에게는 그저 안쓰러울 분인 것입니다. 아마 도 이게 보살의 마음이지 않나 싶습니다.
한편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욕망에 대한 해석입니다. 여타의 불교 영화에서 욕망은 해결해야할 과제고, 숙제였는데 이 영화에서 보여준 욕망은 가혹한 운명 이었습니다.
동자승의 욕망은 엄마입니다. 9살짜리 동자승에게 엄마란 절 대적 존재인 것입니다. 동자승의 마음속은 엄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욕망의 부피 때문에 다른 것은 비집고 들어 올 틈이 없습니다. 엄마에 대한 동자승의 욕망은 토끼를 살생하 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마침내 절을 나가는 행동으로 이어집니 다. 절을 나가면서 인수 아버지에게 한 말이 인상 깊습니다.
“엄마를 찾아 세상 끝까지 가볼 거예요.”
욕망을 쫓겠다는 결론입니다. 그 끝에서 동자승은 서울 보살 이 말한 것처럼 ‘세상 모두가 어머니였다’는 차원 높은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한 욕망을 부여안고 살아가는 떠돌이 의 스산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동자승의 욕망은 동자 승을 울타리 밖으로 내몰았고, 그 세계는 큰스님이 말한 것처럼 욕망과 고통이 가득한 세계인 것입니다.
한편 젊은 스님은 세상 구경을 다녀온 후 여자에 대한 욕망을 갖습니다. 욕망을 갖는 자신이 너무 괴로워서 이를 악물고 참선 을 하고 염불도 외우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손가락을 연 비하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안 되겠는지 어느 날 절을 떠납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욕망을 거스르면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노스님의 여유 자적한 경지는 결코 그냥 이뤄진 게 아니었습 니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동자승이 세상을 여행하면서 세상 만 물이 어머니 아닌 게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경지고, 또한 사춘기 스님의 들끓는욕망을 이겨낸 경지기도 한 것입니다. 젊은 스님 이나 동자승이 욕망을 이겨냈을 때는 큰스님처럼 불교라는 울타 리 안에서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두 사람 다 욕망을 끊기 어려운 사람들이 라는 것입니다. 젊은 스님처럼 나름 노력은 했지만 패배하는 경 우도 있고, 동자승처럼 욕망을 쫓아가는 경우도 있고, 어쨌든 이 들은 모두 욕망의 덫에 갇힌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영화는 이 가 여운 존재들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패 배자들이 바로 우리 중생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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