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는 세상 따뜻하게 하고 괴로움 해탈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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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6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09-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설법 서브카테고리 왕생법문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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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09-09 14:27 조회 1,437회본문
인색한 사람은 극락왕생 할 수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베풀 줄 모른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베푸는 것을 좋아 하나니
그는 그 선행으로 인하여 보다 높은 세상에서 축복을 누리게 된다.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해 가는 방법은 다양해서 하나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핵심적인 원리로는 인과(因果)의 법칙이 연기(緣起)와 만나 전개되는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원리는 세상을 좀 더 부드럽게 하고, 따스하게 하는 가르침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보시입니다. 보시는 베풂을 근본으로 세상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가는 윤활유와도 같은 것입니다.
먼저 『초발심자경문』을 보면 “삼악도(三惡道)의 괴로움을 가져오는 데는 탐욕으로 지은 업이 첫째가 되고, 육바라밀 중에서는 보시가 으뜸이 되느니라. 간탐은 능히 착한 길을 막고, 자비로 보시 하면 반드시 악한 길을 막느니라. 만일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하거든 넉넉지 못하더라도 아끼지 말라. 올 때도 한 물건 없이 왔고 갈 때도 또한 빈손으로 간다. 나의 재물에도 연연할 것 없거늘 다른 이의 재물에 어찌 마음을 구하는가? 살아생전 아무리 많이 장만해도 죽은 다음 가져갈 것은 오직 지은 업뿐이다. 사흘 닦는 마음은 천년의 보배가 되고 백년 탐물은 하루아침에 티끌이 되느니라. 노래하노라 어찌하여 괴로운 삼악도가 생겼는가? 다생토록 탐하고 애착가진 때문일세, 부처님의 사사 발우 이대로 살만한데 무엇하러 쌓고 모아 무명만 기르는고.”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욕심이고, 탐진치 삼독으로 끝없는 괴로움의 바다에 빠져 헤매고 있는 것이요, 괴로움을 해탈하는 방법은 보시뿐이다.
생각해보면 누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기보다는 내가 가진 욕망을 통해 나의 괴로움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재산을 가졌어도 만족하면 행복이고, 만족하지 못하는 욕심은 고통을 낳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복의 기준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가치관을 통해 형성됨을 알 수 있습니다.
보시(布施)는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보(布)’는 나의 재물을 나누어서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뜻 이고, ‘시(施)’는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뜻으로, ‘산(散)’ 또는 ‘사(捨)’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보시에는 진리를 가르치는 법시(法施), 의복이나 음식, 재물 등의 물질을 베푸는 재시(財施), 공포를 제거하여 안심케 해주는 무외시(無畏施)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베푼다는 생각도 없이 베푸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보시요, 대승에서 강조하는 이타적 자비행의 근본인 것입니다.
첫째, 재시는 물질을 원인으로 타인의 고통을 제거해주는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는 자체가 물질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인데 모두에게 물질이 평등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누구는 별 노력도 없어 보이는데 평생을 호의호식하면서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데 주어진 물질적 환경은 궁핍합니다. 이런 경우 불교적 해석은 삼세인과로 설명되는데 과거 전생에 이미 이생을 살아갈 복력을 지어서 지금의 노력과 상관없이 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현상은 그렇지만 문제는 지금부터 또다시 맞이할 미래가 우리에게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물적인 것을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남과 더불어 나눔의 아름다움을 실천할 때 따뜻하고 미래는 평화스러워짐이 재시입니다.
둘째, 법시는 정신적으로 궁핍해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을 위해 좋은 말씀으로 그를 평안하게 하는 일체의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물질을 보시하면 얼마간의 고뇌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베풀면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에 한 생각 돌이키면 일체가 내 것이라는 뜻을 유추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을 돌이키는 원천은 곧 진리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잡아함경』에 “먹을 것을 베풀면 큰 힘을 얻고, 입을 것을 베풀면 잘생긴 얼굴을 얻으며, 탈 것을 베풀면 안락을 얻고, 등불을 베풀면 밝은 눈을 얻으리라.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면 모두를 주는 것이고, 법으로 중생을 가르치면 감로를 베푸는 것이니라. 감로는 세상에 비교 할 수 없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지요.”라고 설하였습니다.
셋째, 무외시는 다른 생명의 공포심을 제거해 주는 행동입니다. 즉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는 나의 자애로움이라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세수하면서 코만지는 것보다 쉽고, 어렵게 말하면 세상에 이보다 힘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즉 다른 이에게 따뜻함과 편안함, 편리함을 제공하는 것이 무외시 입니다.
『업도속업경』을 보면 부처님은 재산을 활용하는데 따라 부자를 세 부류로 나눈다고 하십니다. 재물을 긁어모으면서도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자를 ‘하재(下財)’라 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입지도 먹지도 않으며, 부모에게 공양하지 않고 바른 삶을 지도하는 성자나 수행자에게 공양도 하지 않습니다. 이와는 달리 지성으로 부모와 처자를 봉양하고 손님과 권속을 정으로 돌보는 자를 ‘중재(中財)’라고 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죽으면 무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여 선을 행하고 은혜를 베풀면서 뒷날의 복을 바라지는 않으나, 성자나 수행자를 공경하지 않습니다. 끝으로 부모에게 효순하고 규범을 잘 지키며, 가난한 자와 못난이를 돌보아 주고, 성자나 수행자를 공경하면서 재산을 베푸는 사람들을 ‘상재(上材)’라고 하며 이들은 세상에서 더 견줄 데가 없는 대장부입니다.
물질을 모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보시하기 위한 것일 때 아름다움이 존재합니다. 재산을 모으기만 하고 쓸 줄을 모르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음입니다.
『법구경』을 보면 “인색한 사람은 극락왕생 할 수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베풀 줄 모른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베푸는 것을 좋아 하나니 그는 그 선행으로 인하여 보다 높은 세상에서 축복을 누리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총기32년 3월 <이달의 설법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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