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승(最上承), 금강승(金剛乘)의 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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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5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08-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 읽는 종조법설집페이지 정보
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08-01 15:41 조회 1,501회본문
소승에서 대승으로 고양하며 절대조화에 도달함이 밀교
원정 대성사, “잡음과 부조화도 모두 오케스트라의 요소”
제1장 교상과 사상 편
제1절 밀교란 무엇인가
2. 정통밀교는 조직과 체계를 갖춘다.
하나는 곧 전체(全體)요 전체는 곧 하나이므로 만법귀일(萬法歸一) 일생만법(一生萬法)의 원리(原理)에서 윤원구족(輪圓具足)이라고 하며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는 사(事)와 이(理) 이사무애(理事無礙), 사사무애(事事無礙)의 사법계(四法界)가 그것이다.
인도의 대승불교는 중관파(中觀派)와 유식파(唯識派)의 이파(二派)로서 철학체계(哲學體系)를 수립(樹立)하고「나란타대학」을 중심으로 번영하였으나 양파(兩派) 모두 밀교에 귀착(歸着)하였다. 즉 일즉일체(一卽一切)의 완전한 조화(調和)의 세계의 이론적(理論的) 실천적(實踐的) 실현(實現)이다. 가장 비근(卑近)한 본능적(本能的) 무반성(無反省)의 동물적생활(動物的生活)과 일신(一身)의 이익(利益)만을 도모하는 공리적생활(功利的生活)에서부터 윤리도덕(倫理道德)의 단계를 거쳐서 인간의식(人間意識)과 자연현상과의 발전관계를 더듬으며 소승(小乘)에서 대승으로 고양(高揚)하면서 최후에 절대조화(絶對調和)에 도달하는 것이 밀교다. 따라서 밀교가운데에는 가장 저급(低級)한 욕망(慾望)과 가장 숭고(崇高)한 이상(理想)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잡연(雜然)하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각각 저마다의 가진 곳에 있으면서 전체가 일대조화(一大調和)를 구성(構成)하여 일대교향곡(一大交響曲)을 연주(演奏)하는 것이다. 잡음이나 부조화음(不調和音)에도 모두가 오케스트라의 요소(要素)에 불과(不過)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장 원시적인 생활로부터 가장 발달한 차원(次元)이 높은 사상과 체험(體驗)에 이르기까지 그 도중의 모든 단계(段階)를 극복(克服)하고 절대정신을 보유(保有)하고 있는 것이 밀교다. 밀교는 인도불교에서도 중관파(中觀派) 및 유식파(唯識派)의 당연한 귀결(歸結)이었다. 즉 소승(小乘), 대승(大乘)의 모든 교의(敎義)와 실천을 밟은 뒤에 비로소 밀교가 성립되는 것이다. 비유하면 중고등학교를 거쳐서 대학에 들어가듯 소승, 대승의 모든 교의(敎義)를 배우고 또한 실천한 자만이 비로소 밀교에 들어가게 허용(許容)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도 밀교의 정통(正統)을 전해 받은 우리 진언밀교(眞言密敎)에서도 티벳의 라마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라마교에서도 구사(俱舍), 중관(中觀), 유식(唯識) 등의 일정한 과정(過程)을 다년간(多年間) 학습(學習)한 후에 비로소 밀교를 배우는 것이 허용(許容)된다. 이 때문에 밀교를 최상승(最上承) 또는 금강승(金剛乘)이라고 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 후 불교는 크고 작은 변화를 겪었다. 계승과 발전, 혁신과 새로운 모색이 이어졌다. 부처님의 뜻을 정리하고 이해하는 데 몰두했던 부파불교는 교학의 발전을 이뤘지만 점차 대중과 멀어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대승불교가 탄생했다. 사변화되고 복잡해진 사상의 요체를 간추리고 본래의 불교정신을 탐구해 보살사상으로 도약했다.
불교사상을 깊이 파고들었던 구사론 등 아비담마 시대와 유식학 등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업에서 찾기도 하고 아뢰야식으로, 혹은 진여자성으로 설명했다. 미묘한 마음작용의 원리를 밝혔지만 변하지 않는 그 무언가를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했다. 그리고 중관학파에 이르러 변하지 않는 영원한 자성은 없다는 공사상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사상적 발전의 귀결인 최상승의 밀교사상을 이해하기란 그렇기 때문에 간단치 않다. 『종조법설집』 한 구절 한 구절이 쉽게 읽힐 수 없는 이유다.
먼저 화엄경의 사법계를 짚어보자. 제각각 차별적인 모습을 띄고 있는 현상계를 사법계라 하고, 이러한 대립적이고 차별적인 모습이 사라진 평등한 진리의 세계를 이법계라 한다. 그리고 사법계와 이법계가 둘이 아니라 경계도 없고 걸림도 없다는 것이 이사무애법계이다. 현상과 본질, 사물과 이치, 육체와 정신이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번뇌가 보리이고 생사가 열반이며 중생이 부처인 것이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사사무애법계이다. 현상과 현상, 사람과 사람이 서로서로 비추고 받아들이고 융합하니 그들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고 장애도 없다. 인드라망이다. 하나 속에 전체가 들어있고 전체는 하나로 구현된다. 낱낱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이 세계가 곧 법신불이다. 사사무애법계의 경지는 원효 스님의 '원융무애'한 삶으로 대표된다.
일반적인 설명은 이러하지만 여전히 이사무애법계와 사사무애법계의 차이를 알지 못하겠어서 계속 찾아보니 법륜스님은 이렇게 설명했다.
사법계는 바다에 놀러 갔다가 물에 빠져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세계이고 이법계는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호수에 사는 세계이며 이사무애법계는 바다에는 가고 싶고 물에는 안 빠지고 싶어서 큰 배를 갖고 바다에 나가는 세계라고 한다. 그리고 사사무애법계는 바다에 있는 진주조개를 줍기 위해 바다에 가서 스스로 물에 들어가는 세계로서 물에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도 없고 물에 빠져도 상관없기 때문에 물에 빠졌지만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도 비교했다. 사법계는 깨끗하게 살고 싶은데 물드는 존재, 이법계는 깨끗하게 살려고 더러운 곳에 가까이 안 가는 존재, 이사무애법계는 가까이 가도 물들지 않는 존재, 사사무애법계는 내가 물들고 상대를 살리는 존재란다. 화신, 화현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이해됐다. 소승에서 대승으로 고양하면서 최후에 절대조화에 도달하는 것이 밀교이고, 잡음이나 부조화음도 모두 오케스트라의 요소라고 한 원정대성사의 말씀이 한층 생생하게 다가왔다.
하늘과 땅이 나와 더불어 한 뿌리이고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한 몸이라고 한다.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이다. 하나의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어있다고도 한다. 너무나 익숙한 수사이고 멋들어진 표현이라 반박할 여지가 없다. 머리로는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냥 그런 것이고 원래 그런 것인데 환한 대낮에 눈을 감고 있는 격이라고 하지만 그 눈이 쉽게 떠지지가 않는다. 몸소 체험하고 증득해야 할 터. 그래서 많은 수행자들이 만법귀일 일귀하처,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되는데 그렇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향하는가, 이를 화두로 삼아 일로매진하는 것이리라.
괴테는 이렇게 노래했다. ‘기쁘게도, 얼마나 오랜 세월, 자연이 어떻게 살아가고 창조해왔는지 연구하고 탐구하느라 몰두하느냐? 영원한 통일성. 각각의 사물이 자신의 법칙에 따라 천 가지 모습으로, 작은 것 속 큰 것으로, 큰 것 속 작은 것으로 발견되누나. 변모하고 유지되며, 가까이 동시에 멀리, 멀리 동시에 가까이, 형성되었다 변화하고 성장하는구나. 그리고 나는 찬미하고자 거기 있는 것이라네!’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한 걸음 다가가고 삶의 진실과 가치를 조금씩 깨달아가는 것, 분명 설레고 기쁜 일이다. 부처님의 진리가 가슴에 차고 넘쳐 나날이 찬탄의 기쁨을 누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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