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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사념처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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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84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5-03-03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불교의 선정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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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화령 필자소속 - 필자호칭 정사 필자정보 철학박사 중앙교육원장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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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5-22 12:13 조회 48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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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불교의 선정 (37회)

미얀마의 사념처 수행
미얀마의 위빠싸나 수행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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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과 와선


걸으면서 하는 수행인 경행[행선]을 시작하기 전이나 경행을 하다가 벽이나 장애물에 막혔을때는 잠깐동안 서 있게 된다. 이 럴 때는 그냥 멈춰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시의 대상을 몸의 느 낌에서 마음의 느낌으로 확장한다. 서 있을 때는 발바닥의 감촉 을 주시하고 가다가 멈추려고 할 때는 먼저 멈추려는 의도를 알 아차린다. 그런다음 멈추려는 동작과 주시를 일치시킨다. 즉, 멈 추려고 할 때는 ‘멈추려고 함’이라고 알아차리고 멈추었을 때는 '멈춤’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온 몸을 스캔 하듯이 발끝에서 머리 끝을 주시하며 훑어 올리거나 내린다. 이 때 어떤 특정한 부위의 느낌이 강렬하게 다가오면 그 부위만을 집중적으로 주시해도 된다. 그렇지만 행선을 하다가 멈추게 되는 경우에 는 가능하면 빨리 온 몸을훑으며 주시하는 것이 좋다. 경행을 지 속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고 할 때는 ‘몸을 돌리려고 함’이라고 주 시하고 몸을 돌릴 때는 ‘몸을 돌림’이라고 주시한다. 다시 앞으로 걸어나가려고 할 때는 ‘걸어나가려고 함’이라고 주시하면서 의 도와 동작을 일치시 킨다.

서서 하는 수행인 입선은 주로 행선과 같이 이루어지기 때문 에 그렇게 오랜 시간을 행할 수는 없다. 단지 졸음이 강하게 밀 려오거나 몸이 심하게 찌부듯 할 때는 효과적이다. 서 있을 때 는 양 발을 약간 벌리면 안정적인 자세를 잡을 수 있고 피로도 도 경감시킨다.

누워서 하는 수행은 와선이라고 한다. 수행은 앉아있거나 걷 거나 서 있을 때 뿐만 아니라 눕거나 잠자리에 들 때도 계속한 다. 눕는 자세는 이른바 사자좌라고 하여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 에 대고 눕는 것인데 등을 바닥에 대고 천정을 바라보고 반듯이 누워도 된다. 사자좌를 취하게 되면 심장이 눌리게 되는 부담을 덜어 숙면을 취할 수 있으며 악몽도 꾸지 않게 된다고 한다. 누워 있을 때에도 당연히 주시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 으면 정신이 흐릿해지는이른바 혼침에 빠지게 된다. 누 울 때에도 ‘누우려고 함’이라고 의도를 알아차리고 누우며 천천 히 누우면서 모든 동작과 느낌을 놓치지 않고 주시해야 한다. 몸 을 완전히 눕혀 움직임이 고요해지면 다시 배의 일어나고 들어 감을 주시한다. 잠자리에 누웠어도 바로 잠들지 말고 몸과 마음 의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해 세밀한주시를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 면 오히려 피로가 더 빨리 풀리고 몸이 가벼워진다. 일어날때도 마찬가지로 ‘일어남’이라고 주시하고 몸을 일으키며 모든 동작 과 현상을주시하면서 몸을 움직인다.

수행자가 지치거나 좌선, 경행 등을하면서큰 진전이 없을때 는 누워서 배의 들어가고 나옴을 주시하면서 정신을 집중시키면 좋은 효과를 거둘 수도 있지만 초보자가 누워서 하는 수행을 자 주하는 것은 혼침의 염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좌선과 행선 을 반복하는 것이 좋다. 수행에 있어 굳이 와선을포함하는 것은 24시간 모두를 수행과 결부시키기 위해서이다.


생활선-일상생활에서의 수행


미얀마의 위빠싸나 수행은 일상 생활 가운데에서의 정 념 수행 을 중시한다. 수행자는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어 잠이 들 때까지 항상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주시하 고 알아차리도록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에게 있어서 는 잠자는 시간이 유일한 휴식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외에 는 행/주/좌/와를 포함한 모든 기거 동작에서 주시와 알아차림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수행자는 일상 생활상의 모든 활동 과 느낌에 대하여 주의를 다 기울일 수는 없기 때문에 가장현저 한 현상부터 주시하여 점차 더 넓은 범위로 주시를 확대해 나아 가는 방법을 취하여야 한다. 처음에는 좌선을 통하여 단지 복부 의 일어나고 들어감을 주시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행선, 입선, 와 선을 거쳐 밥 먹고 용변 보며 옷 입고 청소하는 모든 동작과 자 세를 주시하며 몸과 마음의 변화를 관찰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연히 마음은 더 안정되고 알아차림은 점점 민감해 지면서 자 신이 마음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마음이 자신을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된다.

예를 들어 우리 몸의 어떤 부위가 근지럽다고 느끼면 곧 그 부 위에 주의를 돌리면서 그 ‘근지러움’을 주시한다. 이때 우리는 긁 고 싶어지는데 그때는 ‘긁고 싶다’라는 생각을 주시한다. 손을 들어 긁으려고 할 때는 ‘손을 든다’라는 동작을 주시하고 긁을 때는 손이 근지러운 부분과 접촉하는 것을 주시한다. 손을 거두어들 일 때에도 마찬가지로 하나하나의 의도와 동작을 주시한다. 이 렇게 하다 보면 수행자는 마치 노인이나 환자처럼 느리게 움직 여지게 되면서, 모든 동작과느낌에 대해 주시하는 힘이 길러진 다. 빠르게 움직 이다 보면 주시의 대상을 놓친게 되 기 쉽 기 때문 이다.《대념처경》에서는 앞으로 나아갈 때도 물러 설때도 앞 을 볼 때도 주위를 볼때도 팔다리를 구부리고 밥을 먹고 옷을 입 을 때도 언제나 의도를 주시하면서 분명한 앎을 지닐 것을 비구 들에게 룬계하고 계신다. 이렇게 하여 주시하고 알아차리는 능 력이 일상 생활의 모든 것에 적용될 때에 선정력이 향상된다.

진정한 수행은 반드시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24시간 모 두가 수행 그 자체가 되는것이다. 어떤 스님들에게 요즘 뭐하 시냐고 물어보면 수행하느라 바쁘다고 대답한다. 이런 분들은 일상 생활이 수행인 줄을 모르고 반드시 앉아있어야만 수행이 라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대답을 하는 것이다. 위빠싸나 수행도 반드시 앉아있을 때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 중에서도 호흡을 주시하고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하 나도 놓치지 않고 주시하여 알아차리는 노력을 통하여 완성된 다. 수행자는 몸과 마음을 통하여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하 여 평가하거나 집착해서는 안된다. 그저 바라보면서 알아차리 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가 마음이 흐트러지면 다시 호흡에 따라 배의 일어나고 들어감에 주의를 되돌린다. 마하시 센터의 방법은 호흡에 다른 배의 기복을 주시하지만 정통 사념처 수행에서 는 호흡 그 자체에 주의를 기울인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많은 것, 즉 어떤 행위에 앞서 우리의 의도가 먼저 있다는 사실을 놓치 고 그저 자동적으로 행위를 하고 동작을 한다. 그러나 위빠싸나 수행을 하게 되면 우리가 어떤 행위나 동작을 하게 될 때에는 그 러한 의도가 먼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을 일으키고 행위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위빠싸 나를 통하여 우리 자신이라고 믿는 그것 이전에 마음이라는 것 이 먼저 있어 우리를 끌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 에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의도를 먼저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 의 관건이 된다.


의도의 알아차림과 그 효과


위빠싸나 수행이 진행됨에 따라 신체의 동작이 이루어지는과 정을 주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을 더욱 주시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힘이 늘어난다. 마하시 센터의 수행법에서 는 정념으로 의식을 관조하는 이외에도 특히 어떤 동작이나 행 위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을 중시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오래 앉아 있다가 일어서려할 때는 일어서려는 의도가 생긴다. 즉 ‘오 래 앉아 있었으니 일어나야지’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이런 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자동적으로 일어서는 것처럼 생각 된다. 그러나 우리가 정념을 지니고 마음을 주시하게 되면 일어 서려고 할 때에는 ‘오래 앉아 있었으니 일어서야지’ 하는 의도가 미리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오랫동안 서 있은 다음에는 ‘ 이제 오래 서 있었으니까 앉아서 좀 쉴까’하는 의도가 먼저 생긴 다. 우리도 자각하지 못하는 충동이 생겨 자동적으로 그렇게 생 각하고는 앉으려고 하는 것이다. 매일 우리들의 마음에는 수많 은 의도가 일어나기도 하고 주의하지 않는 사이에 사라지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정념으로 모든 의도를 알아차리게 되면 다음 에 일어나는 동작에도 정념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가 정념으로써 뚜렷한 의도를 알아차릴 때 이러한 의도 는 모두 행/주/좌/와의 네 가지 위의와 관련이 있으며 그러한 의도의 알아차림을 일상생활의 모든 동작과 태도에 반영 하여 넓혀나갈 수 있다. 의도의 알아차림을 지속해 나아가다 보 면 우리가 마음을 컨트롤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우리를 컨트 롤한다는 것을 발견할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정념이 없 이 사전에 동작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충동적으 로 하는 것이 되며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금 사회에서 일 어나고 있는 수많은 충동적인 범죄라고 할 것이다. 그들이 자기 마음을 살피는 훈련을 조금이라도 했더라면 그러한 범죄를 저지 르기 전에 자기의 의도를 먼저 알아차리고 자제했을 것이다. 위빠싸나의 수행은 이런 큰 범죄는 물론이고 우리가 일상 생활상 에서 저지르게 되는 많은 행위들을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조절 해 줄 수 있다. 우리는 가끔자기도 모르게 화가 나서 남에게 상 처 주는 말을 내뱉기도 하고 남에게 불쾌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 여 스스로 후회를한다. 그런 것들은 어떤 언동을 할때에 사전에 그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벚어지는 결과이다.

평상시 정념의 훈련이 되지 않아 자신을 살피지 못하는 사람 의 특징은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것이다. ‘나’, ‘ 나의 것’이라는 집착이 강한 사람은 강렬한 자아의식으로 인하 여 자기의 주관하에 모든 것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위빠싸나 수 행을통하여의도를 살피게 되면 ‘나’라는 것이 어떤 행위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를 하려고 하는 마음이 먼저 튀어 나와 그렇게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법구경》에서도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드는 근본이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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