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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다의 나라『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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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85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5-04-02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미얀마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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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5-22 09:57 조회 43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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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다의 나라『미얀마』
그러나 민주주의를 향한 끝없는 저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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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미얀마 불탑, (중앙) 미얀마지도, (우) 쉐다곤 파고다 입구

 


이번호에서는 화령 정사의 미얀가불교 수행을 한번 쉬어면서 미얀마의 이모저모를 알아보는 코너를 마련했다. 소승불교의 상징이자, 위빠사나 수행의 본고장인 미 얀

가를 한번 둘러보자.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그렇듯이 미얀마도 단일 민족 국가는 아니다. 미얀마족이 72%를 차지하고, 칼렌족 7%,카친족 2% 등 소수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용어로 미얀마어를 ‘사용하고 종교는 불교가 86%로 압도적이고, 소소의 이슬람교 4%,힌두교 4%,기독교 2% 등이다. 기후는 대체적으로 열대계절풍 기후이나, 고도가 높은 곳은 온대성 기후를 나타낸다.

1차 산업이 주를 이루고, 농산물가공업과 광산자원을 활용한 중화학공업 등의 육성을 골업화의 기본정책으로 삼고 있다.

쌀/티크/목재 이외 원유/주석/연/아연/동/석탄 등이 풍부한 동남아 굴지의 자원국이다.

1962년 혁명정부에 의하여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채택된 이후 경기침체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72년부터 자유주의적 제도를 일부 도입한 뒤 외자도입과 쌀 증산 성공 등에 힘입어 1977년부터 현저한 회복 기조를 보여왔다. 2007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135억 달러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444 달러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끝없는 투쟁의 역사


미얀마의 역사는 전국에 산재하고 있는 여러 종족의 이동의 역사이다. 미얀마에는 서력기원을 전후하여 인도로부터 농업기술과 불교 우 힌두교가 전하여졌고, 이후 몬족/모족/미얀마족이 차례로 흥기하였다.

18세기에는 몬족이 다시 미얀마족을 정복 하였으나, 곧 미얀마족이 다시 전국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때까지 ‘다고웅’이라고 불리던 도시를 ‘랑군’으로개명하였다.

19세기에 믈어와 미얀마는 점차 영국의 침입을 받아 쇠락해갔고, 1885년 마침내 영국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1886년 영국령 인도에 편입되었다가 1937년 인도에서 분리되어 영 직할령이 되었다.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1948년 1월 4일 영연방으로부터 탈퇴하여 완천독립을 선언하였다. 1962년 3월 네윈장군의 쿠데타로 1948년 이후 집권해 온 우누정권이 전복되었다. 네윈 혁명위원회 의장은 군사혁명정권을 수립하고 삼권을 장악하였고, 그 뒤 미얀마사회주의계획당을 결성하고 사회주의헌법의 제정을 거쳐 1974년 민정이양을 실시하였다.

1981년 11월 네윈 대통령은 건강악화 및 평화적 정권교체 열망으로 우 산유에게 대통령 직을 이 양하고 당의 장직만 보유하였으나, 카리스마적 지도력으로 계속 실권을 장악해 왔다. 1988년 네윈의 사임을 요구하는 학생폭동이 일어난 4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같은 해 소몽 장군에 의한 쿠데타로 반정부운동 세력이 제압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아웅산 수지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현재 1992년 4월 집권한 탄쉐 국가평화발전위원회 의장이 장기집권하고 있으며, 2008년 5월 헌법을 제정하였다. 대외적으로 중도중립을 표방하며, 1948년 유엔에, 1992년에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여 순수비동맹 엄정 중립주의를 기조로 독립자주외교를 추진하고 있다.

초강대국에 대한 불신감으로 미국/소련(지금의 러시아)과의 관계는 일정거리를 유지한 반면, 지정학적 이유로 대중관계를 최고의 외교 문제로 중요시해 왔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적은 일본/서독/오스트레일리아 등과의 실질관계를 확대하고 있고, 동구권과의 협력관계도 유지해 왔다.


한국과의 관계


우리나라는 1961년 8월 미얀마와 영사관계를 수립하였고, 1962년 9월 총영사관을 개설하였다. 1975년 5월 16일 정식으로 수교하였으며, 2007년 현재 상주 대사가 주재하고 있다.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를 공식 방문한 적이 있으나 아웅산 암살폭발사건이 일어나 우리나라 정부요인이 희생당한 적이 있다.

양국은 1964년 6월에 무역 협정, 1972년 1월에 뉴스교환 협정, 1978년 1월 항공운수 협정, 2002년 2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 2006년 9월에 항공 협정을 체결하였다.

우리나라의 대 미얀마 수출액은 2008년 현재 2억 9198만 달러로 주종목은 직물/기계류/목재 등이고, 수입액은 8068만 달러로 주종목은 원목과 철광 등이다.

1981년 현대건설이 7500만 달러 상당의 미얀마 최대의 댐공사를 수주한 이래 우리나라 기업의 미얀마 진출이 활발해졌으며, 2007년 현재 (주)대우, 현대종합상사, 효성, 세계물산등 70여개 업체가 진출해 있다.

양국의 문화교류로는 1983년 10월 우리나라 민속예술단의 미얀마 방문공연이 있었고, 1985년 2월 우리나라 상무 축구단의 방문 친선경기와 1986년 3월 우리나라 태권도 시범단의 방문행사 등이 있다. 제24회 서울올림픽에는 7명의 미얀가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한편, 북한은 1975년 5월 16일 미얀마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아웅산암살폭발사건 이후 미얀마 정부가 1983년 11월 북한 정부 승인을 취소하고 공관원의 철수를 요구함에 따라 1983년 11월 4일 양측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이후 2007년 4월 26일 국교가 재개되어 2007년 현재 상주 대사관이 설치되어 있다.

양측은 1977년 9월에 경제 및 기술협조에 관한 기본협정, 1978년 2월에 항공운수 협정을 체결하였으나 1983년미얀가의 대 북한 단교 이후 모두 폐기되었고, 2007년 4월에 복교합의서를 교환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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