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가장 오래된TV" 비디오 아트를 통해 선불교를 이미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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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89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5-08-05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박물관 순례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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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5-18 11:23 조회 2,997회본문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 백남준아트센터
경기도 수원과 용인의 중간 지점으로 교통의 요지인 신갈에는 한번은 가볼만한 박물관 두 곳이 있다. 경기도가 설립한 ‘도립박물관’과 ‘백남준아트 센터’다.
며칠 전 백남준의 예술적 동반자이자 미망인인 ‘구보다 시게코’가 미국 뉴욕에서 그의 곁으로 갔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필자는 그동안 미뤄 왔던' 백남준의 생애와 그의 예술세계를 조명해 보고자 '백남준가트센터’를 방문했다.
에술의 틀을 획기적으로 바꾼 천재 백남준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서린동) 에서 아버지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 사이 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수송국민학교와 경기 보통중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니스트 신재 덕에게 피아노 연주를, 작곡가 이건우에게 작곡을 각각 배웠다. 1949년 가족이 홍콩으로 이주하자 그는 홍콩 로이덴 스쿨로 전학했다. 1950년 귀국했다가,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칙전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 후 1952년 도쿄 대학교 문과부의 예과에 입학했다. 2년 후 미술사학 및 음악사학을 전공하고, 주로 작곡 과 음악사학을 공부했다. 졸업 논문은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이다.
1956년 백남준은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대학 교 및 쾰른 대학교 등에서 서양의 건축, 음악사, 철학 등을 공부했다. 뮌헨 대학교 입학 1년 후에는 프라이부르크 고등음 악원으로 옮겨 볼프강포르 트너 교수에게 배웠지만, 곧 현대음악의 실'험이 활발하던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 참여했다.
1958년 그 곳에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 그의 자유로운 음악적 실행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1950년대 말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독일 라인 지역의 음악 퍼포먼스의 장에서 백남준은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앨런 카프로)라고 불릴 정도의 탁월한 퍼포머로 활약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바이올린을 파괴하거나(바이올린 솔로)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버린 퍼포먼스(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가 특히 유명하다. 1961년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음악 퍼포먼스 ‘오리기날레’에서 머리와 넥타이로 잉크를 묻혀 두루마리에 흔적을 남기는 독특한 퍼포먼스 머리를 위한 선을 보여주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조지 마키우나스, 요셉 보이스 등을 만나 플럭서스 활동을 전개했다. 다다이즘에 영향을 받은 플럭서스는 헤라클레이투스가 주장 한 ‘변화 생성의 흐름’ 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이벤트와 퍼포먼스 그리고 음악에 주력했고, 세계로 퍼져나갔다.
본격적인 비디오 아트의 세계로
백남준은 슈토크하우젠이 중심이 된 쾰른의 WDR 전자음악 스튜디오에 출입했으며, 특히 레이더와 TV 작업에 몰두했던 독일 작가 칼 오토 괴츠의 영향을 받아 2년 동안 홀로 TV 실험에 착수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1963년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자신의 첫 번째 전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열었다. 13대의 실험 7우를 통해 비디오 아트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이 전시에는 ‘총체 피아노’, ‘랜덤 액세스 뮤직’ 같은 실험적 음악의 시도와 ‘잘린 소머리’, 파괴된 누드 마네킹’, ‘보이스의 피아노 파괴 퍼포먼스’ 같은 파괴적 에너지의 설치 및 참여적 형태의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청년 백남준은 이러한 내용을 ‘동시성’, ‘참여’, ‘임의접속’ 등에 관한 16개의 테마로써 종합적인 큐레이팅으로 보여주었다. 지금은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연구자들 사이에 활발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1964년 백남준은 일본을 거쳐 뉴욕으로 이주했고, 1965년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으로 미국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곧바로 그 영상을 ‘카페 오 고고’에서 방영했다. 이것이 미술사에서는 공식적인 비디오 아트의 시작으로 기록됐다. 또한 첼로 연주자이자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의 기획자였던 샬럿 무어먼과 함께 비디오 아트와 음악을 혼합한 퍼포먼스 작업을 활발히 펼쳤다. 특히 1967년 음악에 성적인 코드를 집어넣은 백남준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샬럿 무어먼은 누드상태의 첼로 연주를 시도하다가 뉴욕 경찰에 체포 되어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로 인해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TV 첼로’, 침대’ 등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많은 활동을 전개했다.
1974년부터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설치 작업을 다양하게 진행했으며, "TV 부처",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등등 많은 대표작을 선보였다. 이 작품들은 비디오 아트와 자연물을 음악적으로 혼합하여 테크놀로지로 물든 현대 사회의 새로운 혼합적 생명력을 추구했으며, 선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판을 얻었다. 1982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최된 ‘백남준 회고전’을 통해 그의 예술 세계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사회에 많이 알려졌다.
위성을 통해 세계인과의 만남.
1970년대 중반부터는 뉴욕 WNET 방송국, 보스턴 WGBH 방송국과 협력하여 자신의 비디오 아트를 공중파 TV에서 방송했고, 이는 예술 세계의 영역 확장이었다. 나아가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퍼포먼스를 뉴욕 때27 방송국과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송하여 전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위성 아트에는 로리 앤더슨, 피터 가브리엘,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앨런 긴즈바그, 이브 몽탕 등이 참여했으며, 전 세계 2천 5백만명(재방송 포함)이 시청하였다. 이후에도 ‘위성 스코끼리마차 아트’ 3부작으로 명명된 ‘바이 바이 키플링’(1986), ‘손에 손잡고’(1988) 등이 이어졌다.
1993년 백남준은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초대되어 최고 전시관 부문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이 전시에서 그는 일렉트로닉 수퍼 하이웨이(전자 초고속도로) 라는 이름으로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배경으로 한 ‘칭기스칸의 복권’, ‘마르크폴로’, ‘훈족의 왕 아틸라’,‘스키타이의 왕 단군’, ‘로봇 전사’, ‘고대기마인물상’ 같은 작품들을 다수 내놓았다.
1995년 백남준은 제1회 ‘광주 비엔날레 INFO art 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같은 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설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써 한국 미술이 세계 진출을 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다. 1996년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며,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세계’ 라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으며, 이때 백남준은 레이저 아트 ‘야곱의 사다리’, ‘삼원소’ 등을 전시한 바 있다.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아내인 구보다 시게코의 손을 잡고75세를 일가로 사바 세계와 이별한다. 그이 유해는 서울, 뉴욕,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다.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 백남준아트센터
경기도립 백남준아트센터는 2002년 경기도와 살아 생전의 백남준이 백남준 미술관의 설립 계약을 맺었고, 백남준은 이 미술관의 성격을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으로 명명하였다. 2008년 4월 30일 준공식을 치렀고, 10월 9일 공식 개관하였다. 초대 이영철 관장은 개관 행사로 NOW JUMP 페스티벌을 기획 추진했고, 국내 최초로 외국인 큐레이터 토비아스 버거, 클라우디아 페스타나 등을 기용하여 미술관의 본격적인 국제화를 시도하였다. 백남준아트센터의 전시는 기획전 수퍼하이웨이 첫 휴게소, 신화의 전시-전자 테크놀로지, 랜덤 액세스 등과 분기별로 개편 전시되는 백남준 상설전을 펼쳤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는 제1회 '국제예술상’을 주최하여 수상자로 설치미술가 이승택, 무용가 안은미, 미디어아티스트 시엘 플로이에, 일렉트로닉 아티스트 로버트 애드리안 엑스 등으로 결정했다. '국제예술상’은 과학기술과 예술이 대칭적으로 결합된 백남준의 예술세계에 경의를 표하고 제2의 백남준을 발굴하기 위해 2009년 처음 마련한 상이다.
2010년 1월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이 집필한 글을 편집한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를 '꾹내 최초 번역 출간했고, 3월 백남준 예술의 코드를 집대성한 리소스 북「백남준의 귀환」을 출간했다. 이 두 권의 책은 백남준 연구 붐을 일으킬 만한 기본 자료가 되었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백남준의 말이 그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개념이듯이, 음악과 더불어 달은 백남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 가운데 하나이다. 로비에서 관객들을 맞이하는 [TV 물고기 1975(1997]는 생명과 기술이 만들어낸 리듬이자 ‘물에 빠진 달’의 형상이 되고, 백남준의 첫 전시를 상징하는 소머리의 뿔은 밤에 뜬 초생달로도 보인다. 이는「월인천강지곡」의 한 구절을 통해서 백남준이 선불교에 대해 지녔던 예술적 통찰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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