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체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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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52호 발행인 법공 발간일 2004-02-02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생활속의 밀교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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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11 07:46 조회 5,185회본문
당체법문을 당체설법이라고도 한다. 당체는 ‘바로 그 본 체를 말하는 것’으로, 밀교에서 변치않는 진리와 우주 삼라만상의 모습과 본성을 나타낸다. 즉 법신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을 의미한다.
그래서 ‘당체법문’ ‘당체설법’이라 하면, ‘비로자나부처님께서 무언무형의 법과 진리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이치를 깨닫게 하는 가르침을 가리킨다.
당체는 법신 비로자나불이고 법문은 지혜의 문을 뜻하므로, 당체법문은 바로 법신 비로자나불의 가르침과 진리이다. 법신 비로자나부처님께서 설하시는 진리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당체설법이다.
당체법문은 일체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이 바로 진리이며 그속에 지혜가 있다는 가르침이다. 현상이 곧 진리이므로 당상즉도요, 즉사이진 인 것이다.
이 당체법문을 통해 진언행자는 지혜를 얻게 된다. 이러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 진언행자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바로 진언을 염송하는 것이다. 진언염송을 통해 당체설법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수행을 하지 않으면 지혜를 맛볼 수 없다. 바로 법신 비자나부처님의 당체설법을 통해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
일상생활 가운데서 불공을 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이나 현상, 어려운 난관 과 고난 등을 만나게 되는데, 난관을 극복 하지 못하고 현상을 진리로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가게 되면 그 난관과 현상이 곧 마장이 되고, 희사법을 쓰며 염송정 진에 들어가 이를 잘 받아들이고 지혜로서 헤쳐나가면 그 난관과 현상들은 나에게 당체법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조 원정 대성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불공 중에 오는 마장을 현실로써 막지도 않고 만약에 진리로써 막지도 않는다면 그 결과가 어떻겠는가. 만약 상지상근사람들은 삼밀관행으로 보리심의 대응가약을 얻은 것만으로써 일체번뇌를 극복하여 능히 공덕을 성취하되 요말의 중생은 삼업이 습성되고 삼독이 고질되어 있는 고로 병에 응해 약을 안주고 그 미진에 약 안주면 시련고개 못이기며, 시간 어겨 중단하고 마장 따라가는 고로 마장있는 그때마다 육행약을 쓰게 되면 끓는 물에 얼음 같이 마장 없어지느니라. 불공만 정하면 마장이 오는 일이 더러 있는데 무슨 까닭이냐 하면 불공 중에 오는 마장은 공덕되기 위해 오는 것이므로 먼저 탁하고 뒤에 맑아지는 법이라. 밀교의 삼륜신은 관행자가 공덕을 성취하 려고 정진할 그 때에 법을 주어서 행자로 하여금 자기의 허물과 결점을 체험으로 알게 하고 없애도록 하기 위해 오는 법을, 아직 증득하지 못한 사람들은 마장이라 하느니라. 삼륜신은 병에 응해 약을 주는 법문을 베풀어서 육행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 법신 부처 님의 근본서원인 고로 행자가 육행 중 하 나라도 행하는 데 마가 아니라 도리 어 공덕이 되어 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법문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 히려 구업을 짓는 경우가 많다. 또 남의 법문을 가지고 말하기를 좋아하여 무성한 억측이 난무하기도 한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돌아다닌다.
그래서 교도나 스승이나 가정에 법문이 닥치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경계한다. 정작 법 문 그자체 보다 말이 퍼져나가는 것에 더 신경을 쓰인다. 왜 그럴까? 당체법문을 제대로 수행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좋지 못한 공업만을 짓고 있을 뿐이다.
법문을 당한 이를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그 이의 불행을 안타까워 하고 빨리 해탈 하기를 서원하자. 법문을 보게 되면 너와 나 할 것이 없이 일체 말을 삼가하고, 스 스로 법문임을 자각하고 마음속으로 짐작 하며 오로지 불공과 희사법으로 묵묵히 정진으로 헤쳐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입 으로 ‘법문이다. 법문이네.’하고 떠들 일이 아니다. 그것은 수행자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언행들이다. 해탈과 소원의 성취는 요원할 뿐이다. 남의 우환과 불행을 안타까워 하며 말없는 가운데 서 불공하고 희사법을 세워 주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이다. 그것이 생활 속의 밀교 수행이요 당체법문의 바른 이해이다.
〈법경/법장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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