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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궈 ‘마음부자’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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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03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08-06-02 신문면수 12면 카테고리 기획 II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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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윤우채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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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19 12:38 조회 2,13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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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궈 ‘마음부자’ 됐습니다
“부처님 일이니 사서라도 고생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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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치 정각사 기와지붕이 시야 에 들어 온다. 파아란 하늘과 싱그러운 신록을 배경으로 오색 연등 이 주렁 주렁 걸려 있다. 서원당에선 교도들이 둘러 앉아 연등을 만들고 다 느라 분주하다. 도량엔 부처님 오신날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정각사의 산 역사


총지종 포교 거점도량 부산 정각사 는 총기 원년 동래구 명륜동에서 태동 했다. 초대 주교 정각원 스승의 자택 을 무상 시주 받아 설단불사를 한 후 부산 선교부를 개설하였다.

그후 총기 4년 총지서원당으로, 총 기 6년에는 정각사로 개칭하고, 사원 신죽 헌공불사를 봉행했다. 종기 24년 에는 도량 옆에 지하2층 지상4층의 부 속 전당을 신축하고 어린이집과 사택 등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정각사는 창건 초기 교도 수의 폭발 적 증가로 부산지역 여러 곳에 분원 형태의 수행공간을,개설하기도 하였 다. 종단의 내로라 하는 스승들이 '이 는 일도 없으니 보살이 따로 없지요” 정각사 주교 법공 정사가 큰 신뢰를 담아 말했다.

신 인록 보살은 총지종 신정회 부산 경남 지회장을 13년째 맡아 해오고 있 다. 주위에선 고생한다는 뜻으로 “일 복 많다”고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소리는 전연 안한다고 한다. 다 만 내심으로만 ‘부처님 일하는 복이 많은 것이니 사서라도 고생해야 겠다’, 는 생각을 한다고. 이런 데에는 사연 이 하나 있다.

입교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 이다. 하루는 꿈을 꿨는데 당시 주교 였던 정각원 스승님이 나와 법대를 땅에 떨어뜨려 놓고는 주워 달 라고 하더란다. 게다가 서원당은 책상, 의자들로 가득차 운신을 못할 정도였 다. 법대를 주워 드리고는 물건들을 말끔히 정돈을 해 놓고 나왔다고.

그후 얼마 안 있다가 스승님이 부르 더니 정각사 총무를 하라고 했다. 석 삼 년을 하고 나니 다시 회장을 시키 고 나중엔 지회장 소임까지 맡겼다. 신 인록 보살은 그 때 그 꿈이 부처님일 많이 하라는 법문이 아니었겠냐고 말한다. 


“중생은혜 마이 갚으이소”


신 인록 보살은 40여년전 부산 전포 동에 있는 진언종 사원을 다녔다. 여 러 해 몸 담았지만 뜻이 맞질 않았다. 그러다가 각자님(노진율 72)과 인연이 있었던 이에게서 정각사 얘기를 들었 다. 어느 날 정각사를 물어 물어 가서 는 스승님에게 대뜸 “경제해탈 하러 왔다”했더니 스승님이 허허 웃더니 “중생은혜 마이 갚으이소”라고만 말했 다 한다.

그렇게 입교 후 한 삼 년 열심히 진 언수행을 하니 경제해탈은 물론 여러 가지가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각자님이 사업을 시작하였고 자녀들은 대입시험을 치르던 시기였다. 불공을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자연 알게 되었고, 순조롭게 일들이 성사되 었다.

입교 초기에는 월초불공 때가 되면 공식, 동참불공은 물론 오후 7시간 가 행정진을 해나갔다. 그렇게 정진을 하 고는 밤이 이슥해져서야 귀가하는 게 다반사였다.

“초발심때엔 일은 많고 시간은 없어 서 주로 빨래를 하거나 길을 다닐 때 에 항송을 했어요. 주야육시는 물론이고 행주좌와에 입에서 진언이 떨어지지 않게 애썼죠”

그렇게 수행을 해가면서 보살은 문득문득 느끼는 바가 있었다. 지금의 고통 은 내가 알게 모르 게 지어 놓은 업장 때문이라는 것이 가 슴깊이 와 닿았다. 그리고 현생에 기억 에 남는 잘못된 습 관들, 과거생에 지었 을 무수히 많을 죄 업들에 대해 참회했 다.

신 인록 보살은 몇 해전 건강이 악 화돼 세 차례나 큰 수술을 받았다. 그때 각자님이 얼마나 다 급했는지 수술실에 들어가는 보살 귀에 대고 누가 보든 안보든 아주 큰 소리로 “여보! 옴 마니반메훔”을 세 번이나 외치고는 간절히 불공을 올렸다고 한다. 보살은 보름만 에 거뜬히 퇴원했다. 요즘은 비상약도 안 먹고 매달 통원치료만 받는단다. 힘들 법도 하건만 보살은 인터뷰 내내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늘 부처님 과 함께 한다는 법열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 인록 보살은 정각사 창건 초창기 신도들이 구름같이 모이던 때를 지나 왔기에 종단 중흥을 위한 포교와 교화 방편에도 관심이 많다.

“우리 사원 주교이신 법공 정사님 자랑 좀 해야 겠습니다. 정사님은 오 랜 교화경험을 바탕으로 귀에 쏙쏙 들 어오는 설법을 들려 주시는 것으로 유 명하답니다. 또 법회시간 중에 유익한 한자 공부나 경행과 체조로 활력을 불 어 넣어 주시죠. 아동센터와 문화센터 를 운영해 요즘 사람들의 구미에 맞도 록 애를 쓰고 계시기도 하구요.”

보살이 일본과 교류가 잦았던 진언 종에 다녔던 경험을 되살려 일본의 생 활불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일본불교에선 대개 진언수행을 주 로 하는데 마을 도처에 절이 있어서 무시로 절에 참배를 할 수 있고, 회사 출근 전에 희사만 하고 가기도 합니 다. 생활상에 맞춰 수행이나 불공법에 융통을 두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우 리 종단도 현실을 반영한 불공법을 고 안해 바쁜 현대인들을 포용하고 젊은 이들도 진언수행을 쉽게 접할 수 있도 록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오래 전 늘 일거리가 끊이지 않는 신 보살에게 정각원 스승님은 “부잣집 은 일이 많다. 가난해서 굶는것 보다 는 나으니 불평말고 누구라도 부자되 고픈 사람 여기와서 열심히 불공하라” 고 가르쳤다 한다. 스승님 말씀을 의 지처로 신 보살은 묵묵히 대소사를 치 러내고 철저히 마음공부도 해나갔다.

지금 신 인록 보살은 누구보다도 큰 부자다. 땀흘려 일해 재물이 많은 부 자도 됐지만 심전(60)을 열심히 가 꿔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가보를 지닌 ‘마음부자’가 됐으니 말이다.


- 윤우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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