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최대의 대학 ‘나란다’
페이지 정보
호수 307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06-01 신문면수 13면 카테고리 신행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남혜 필자소속 - 필자호칭 정사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07-07 15:35 조회 7회본문
세계 최초, 최대의 대학 ‘나란다’
경전을 짊어지고 히말라야산맥 넘어 티베트으로···
넷째 날 오전 영축산, 빔비사라왕의 감옥 터, 죽림정사, 칠엽굴을 순례하고 점심 공양 후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대학이었던 나란다 대학 터로 향하였다. 라즈기르(왕사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리불 존자와 목련 존자가 태어난 바르가온이라는 마을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두 제자가 태어난 바르가온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500명의 상인이 돈을 모아 파바리카라는 망고나무 동산을 기증했다. 부처님께서 3개월간 머무르시며 가르침을 전한 것이 나란다의 시작이라고 전한다.
나란다 대학에 도착해 먼저 사리불 존자의 스투파에 참배하였다. 기원전 250년경 아소카왕은 사리불 존자를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인 나란다에 사원과 존자의 스투파를 세웠다. 기원후 5세기경 굽타왕조의 왕 쿠마라굽타 1세는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나란다 사원을 지었고, 그 후 계속해서 확대, 증축이 이어지면서 세계 최대의 종합대학으로 발전하였다. 나란다 대학은 가로 11km, 세로 5km나 되는 거대한 넓이의 대학촌이 있었다. 인도인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나란다 대학의 유적은 54km로 세 개의 도시에 걸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발견된 유적지는 대학의 극히 일부분이라고 한다.
사리불 존자의 스투파를 참배한 후 당시 나란다 대학에서 공부하던 스님들의 거처였던 곳을 둘러보았다. 특히 당나라 현장 스님이 쓰던 방도 볼 수 있었다. 당나라 현장 스님이 쓴 『대당서역기』에 “세계 각국에서 모인 재능과 학식을 겸한 1만여 명의 스님과 이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2,000여 명이나 되었고, 매일 100여 개의 강의가 열렸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나란다 대학이 얼마나 큰 대학이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스님이 생활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왕오천축국전』을 쓰신 신라의 혜초 스님은 불교를 공부하고자 이역만리 불원천리 나란다 대학에 찾아가셨으나, 정식 학생으로 입학하진 못하고 그곳에서 공부하다 중국으로 돌아가셨다. 나란다 대학은 세계 각국의 수많은 수행자가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찾아왔으나 정식 입학할 수 있는 인원은 정해져 있어서 시험을 통해 열 명 중 두세 명만 정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융성했던 나란다 대학은 이슬람의 인도 침공으로 사라졌다. 많은 스님이 희생되었고, 불교경전이 불살라졌다. 불타는 연기가 6개월간 솟아올랐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2세기 말 무슬림 왕조의 박티야르 칼지(Bakhtiyar Khalji) 장군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 나란다 대학을 군사 요새로 착각한 박티야르 칼지는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겨두지 않고 도륙해 버렸다.”라고 한다.
그 당시 많은 스님이 경전을 짊어지고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티베트로 향하였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지 못한 스님들은 경전을 산속 동굴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그 숨겨두었던 경전이 후대에 발견되어 불교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는 “우리가 가진 불교 지식의 원천은 모두 나란다 대학에서 왔다”고 말하였다.
이슬람의 침공으로 수많은 스님이 희생되고, 불교경전이 불탔으며, 인도에서 불교가 쇠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따라 인도에 있던 수많은 경전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티베트와 중국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불교 경전과 불법을 수호하고자 한 스님들의 희생과 원력이 현재까지 이어져, 동굴 속에서 경전이 발견되고 불교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것이 아닐지 생각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