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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은 위대한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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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07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06-01 신문면수 4-5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 읽는 종조법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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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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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07-07 15:21 조회 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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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은 위대한 교육자

제1장 교상과 사상 편

제3절 각종 논설


7. 해탈은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인격 완성을 의미한다


해탈이란 고의 근거인 번뇌로부터의 해탈로서 고의 멸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의 현실적 생애 중에서 이뤄지는 것이지 결코 격세적 생존을 가리킬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형이상학적 실제와의 일치나 윤리적 선의 완성이나 또는 인생을 방관하는 체념 혹은 허무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여실지견에 의한 우주 인생의 진리를 철견하여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인격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심중의 악마와의 투쟁에서 절대적 승리를 거두고 인생의 진리를 증오하여 절대 안온의 이상세계를 체현했다. 전기에 의하면 석존은 보리수 하에서 성도 후 칠일 간 해탈락을 수용했다.

불의 이상인 열반은 결코 단순한 적정이나 휴지가 아니라, 현실에 약동하는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석존은 원만한 인격자인 동시에 위대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고백하건대 매달 이 글을 쓰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해탈은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인격 완성을 의미한다’ 이 말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정 대성사의 생애와 가르침을 공부하며 가장 처음으로 가슴을 두드린 구절이다. 이 한 말씀으로, 뵌 적도 없고 자세히 알지도 못했던 대성사에 대해 호감과 믿음이 생겼다. 『종조법설집』에 실려 있는 귀한 말씀을 아는 사람이 적고 그 가치를 알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대성사의 가르침을 언젠가 보다 찬찬히 음미하겠다 마음먹었다.

불교의 이상이라 할 수 있는 해탈에 대하여 너무나 쉽고 간결하게 정리한 것이 우선 좋았다. 단어의 뜻풀이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풀어주어 그동안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수행의 목표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과제로 다가왔다. 멀게만 느껴졌던 개념이 훅, 하고 다가온 느낌이었다.

해탈이라고 하면 어딘가 초월적인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번뇌에서 벗어나고 욕심으로부터 초연해지는 것이 보통 사람으로서 감히 꿈도 꾸기 어렵다’ 여기며 지레 나와는 먼일이라 치부해 왔다. 열반이라는 말은 또 어떤가. 죽음과 동일시되기 일쑤이고 번뇌와 욕망의 바람이 사라진 고요한 경지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자꾸 저 하늘의 뜬구름처럼 여겨졌다. 해탈, 열반, 깨달음, 정각, 부처…. 이상향이기는 한데 그것이 진정 내 삶의 목표가 되지 못했다.


이번 생을 생사윤회의 마지막이 되게 하겠다는 싯다르타 태자의 다짐은 결연했다. 생사윤회가 누구에겐들 괴롭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을 불현듯 맞이하고 속절없이 끌려다닌다.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그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끊고 싶다는 마음이 들다가도 상황이 잦아들면 금세 잊어버리기 일쑤이고 그럴듯한 당의정에 속곤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셨다. ‘과거에도, 지금도, 나는 오직 고와 고의 소멸만을 말할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원인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성찰하여 그 완전한 해결의 길을 찾았다. 고집멸도 사성제, 무아와 무상의 연기법, 탐진치 삼독심과 계정혜 삼학 등이 모두 고통스러운 현실의 이치이자 극복의 길이다. 밖에서 주어진 수많은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의 핵심임을 팔만사천법문으로 설했다.

그래서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고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으니, 수행의 요체는 오직 범부의 집착을 없애는 것일 뿐 따로이 성인의 지혜를 구할 것이 없다고 했다.


구상 시인의 시 ‘꽃자리’를 좋아한다. 특히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고 /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고 /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는 구절은 그대로 번뇌와 해탈을 이야기한다. 자신을 얽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얼마 전 진료를 받는데, 지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사회 초년생처럼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부모님의 기대를 받고 자라 평가에 무척이나 예민하고 소심하다. 방송일을 하다 보니 매일의 생방송 일정은 그 자체로 사람을 옥죈다. 시간 맞춰, 출연자와 진행자와 피디와 청취자에게 만족할 만한 이야기를 내놓아야 한다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그러니 머릿속은 늘 다음 방송 일정과 이야깃거리로 복잡하다.

한 스님께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보니 나중에 치매 걱정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니 뇌가 쉴 때가 없어 저절로 치매 예방이 될 줄 알았는데 놀랐다. 노심초사하고 좌고우면하는 습관이 마음 건강에 좋지 않으니 어서 선정 수행을 시작하라 하셨다. 단어 하나도 이렇게 쓸까 저렇게 고칠까 숱하게 고민하며 왔다갔다 하는 어수선한 마음을 잡아줘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했다.

평소 돈이나 명예나 겉치레에 대해서는 욕심이 많지 않은 편이라 꽤 초연하다고 자신했다. 갖고 싶다는 마음이 적으니 흔들림도 적다고 여겼는데 착각이었다. 시계추처럼 쉴 새 없이 방황하는 분별의 마음을 줄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마다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는 집착의 끈은 다를 것이다. 허세와 허명에 끌려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신념과 확신에 옴짝달싹 못 하는 사람도 있다. 탐욕이 강한 이는 보시바라밀부터 실천해야 하고, 화가 많은 사람은 인욕바라밀에 집중해야 하며, 어리석다면 부처님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나처럼 걱정과 불안이 크다면 굳건한 마음의 심지를 키워야 한다. 선정 수행을 서둘러야 한다.


『초발심자경문』 등에서 많은 수행자가 ‘주인공아!’ 하고 우리를 부른다. 경봉 스님께서는 깨달음에 다다른 후 이렇게 문답하기도 했다. “쯧쯧 무정한 나의 주인공아. 이제야 만나다니 어찌 이리 늦었나. 하하 우습다. 내가 그대 집 속에 있었건만 그대 눈이 밝지 못해 이같이 늦었을 뿐이네.”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의 욕망을 미끼에 빗대셨고, 갖가지 견해를 그물이라고 비유하셨다. 그릇된 욕망이라고 하는 미끼를 물지 않고 삿된 견해라고 하는 그물에서 탈출하는 건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고뇌에서 풀려나는 건 오직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마음의 굴레가 적어야 삶이 자유로울 것이다. 내 마음에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주인공의 자리를 넓혀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삶을 펼치고 싶다. 나의 인격은 오로지 수행으로 완성할 수 있다. 번뇌와 욕심과 집착의 마장을 벗어버리고 가볍고 힘차게 날아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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