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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련제려야사 스님의 교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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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05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04-01 신문면수 10면 카테고리 신행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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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한주영 필자법명 - 필자소속 불교환경연대 필자호칭 사무총장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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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04-15 15:13 조회 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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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생명살림경전이야기 (27회)

나련제려야사 스님의 교화행

사문 나련제려야사(那連提黎耶舍)는 중국말로는 존칭(尊稱)이라 부르며, 북인도 오장국(烏場國) 사람이다. (중략) 그 나라 임금은 부처님과 같은 씨족이고, 성도 역시 석가(釋迦)이며, 찰제리(刹帝利) 종족이다. 이 찰제리를 중국말로 번역하면 토전주(土田主)라는 뜻이다. 이것은 겁(劫)이 시작된 초기에 먼저 땅을 나누어 주인이 되게 하였으므로 이런 이름으로 불렀다. 지금은 이른바 국왕이 바로 그것이다.

나련제려야사는 나이 열일곱 살 때 발심하여 출가하였고, 이어 이름난 스승을 찾아가 바른 가르침을 두루 들었다. 스물한 살 때 구족계를 받았다. (중략) 나련제려야사는 늘 번역하다가 틈이 날 때는 신주(神呪)를 베풀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구제하였고, 또 드러나게 사람들을 도와 공을 세우는 일이 많았다. 얼마 지난 뒤에 나라에서는 그에게 소현도(昭玄都)의 소임을 부촉하였다. 곧 자리를 바꾸어 소현통(昭玄統)이 되게 하였다.

그는 나라에서 얻는 공록을 자신의 생활에만 쓰지 않고, 즐거이 자애로운 마음을 일으켜 기꺼이 복된 일을 일으켰다. 공양을 마련하여 스님들에게 음식을 공양하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에게 보시하였다. 옥에 갇힌 죄수와 축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구제하였고, 저자의 좁고 번잡한 곳에는 우물을 만들어 몸소 물을 길어 중생들에게 넘치게 공급하였다.

또 급군(汲郡)의 서쪽 산에 세 개의 절을 세웠는데, 샘이 있는 골짜기를 끼고 있어서 산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또 몹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거두어 요양토록 하고, 남녀의 구역을 서로 달리하여 사사공양(四事供養)하여 힘써 두루 공급하였다. 또 돌궐(突厥)의 객관(客館)을 찾아가서 육재일[六齋]을 지킬 것을 권유하고, 양의 고기를 끊고 방생하게 하고 채식을 먹게 하였다. - 『개원석교록』 제6권


『개원석교록』은 당나라 개원(開元) 18년(730)에 지승(智昇) 스님이 엮은, 가장 잘 정비된 불교 경전 목록으로 꼽힌다. 중국에서 번역된 경전 목록을 정리한 것으로 언제 누가 번역했는지, 당시의 사정과 번역한 사람에 관해서도 설명이 되어 있다. 그중에서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된 『보살견보삼매경(菩薩見寶三昧經)』을 번역한 나련제려야사 스님의 이야기다. 그는 나라에서 얻는 공록을 자신의 생활에만 쓰지 않고, 음식을 마련하여 스님들에게 공양하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에게 보시하였다. 옥에 갇힌 죄수와 축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구제하였다. 또 몹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거두어 요양토록 하고, 사사공양하여 힘써 두루 공급하였다.


교화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닐까?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 옥에 갇힌 죄수나 몹쓸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대개 꺼리고 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기꺼이 보시하고 음식과 의복과 침구와 약을 힘써 두루 공급하였다 하니 수희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바로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건강을 돌보고 수명을 이어주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마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물까지 보살핌의 손길을 주었다고 하니 스님의 자비행이 실로 크다.


기후 위기 시대에 재난은 점점 빈번해질 것이다. 우리는 재난에 취약한 사람들에게 각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기후 위기는 인간의 과도한 생산과 소비에서 비롯되었으니, 소비와 생산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인은 물질적 풍요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있다. 자연만 파괴된 것이 아니라 마을공동체가 파괴되고, 사람들은 고립되고 외롭다. 소비주의는 결핍을 강요한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소비하기 위해 더 오래 일해야 하고, 서로를 보살필 시간은커녕 자신을 돌볼 시간조차 없다. 그래서 외롭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결코 혼자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돌봄이 필요할 때 돌봄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사람답게 산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먼저 선의를 베풀면 그 사람도 또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야 우리 사회는 서로 돕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다.


돌궐의 객관을 찾아가서 육재일을 지킬 것을 권유하고, 양의 고기를 끊고 방생하게 하고 채식을 먹게 하였다고 하니 스스로 동물을 보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확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위를 살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나 육식을 끊고 채식하는 것 모두 생명을 살리는 길이다. 좁은 우리에 갇혀서 동물로서의 본능마저 억압당한 채 오직 사람을 위한 고깃덩이로 살아가다 수명보다 더 빨리 죽임을 당하는 공장식 축산동물을 본다면 나련제려야사 스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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