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신문 아카이브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반야를 길러라

페이지 정보

호수 295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6-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설법 서브카테고리 왕생법문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6-20 16:34 조회 110회

본문

반야를 길러라


“교만의 티끌 속에 지혜는 묻혀만 가고 아상·인상·사상 위에서 무명은 자라만 가네, 제 잘난 체 안배우고 세월만 보낸다면 병들어 신음할 때 한탄만 가득하리”


“교만의 티끌 속에 감추어진 반야!”


반야가 무엇인가? 반야는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입니다. 모든 부처님은 반야를 성취하여 성불하신 것입니다. 이 반야를 우리는 ‘지혜 지(智)’로 풀이합니다.


일월(日月)과 같이 밝은 ‘지(智)’는 알 ‘지(知)’ 자와 전혀 다릅니다. ‘지(知)’는 ‘화살 시(矢)’에 ‘입 구(口)’를 더한 글자로, 화살처럼 귀로 들어왔다가는 입으로 나가버려서 내 속에 오래 머물지도 않고 진정한 나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곧 ‘지(知)’는 제 나름대로 알아서 써먹는 분별지(分別知)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반야의 지혜는 무분별지(無分別智)입니다.


분별이 없기 때문에 절대적이요, 보편타당하며, 평등하고 원만한 지혜입니다. 이러한 무분별지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지(四智)라고 합니다. 부처님만이 온전하게 발현시킬 수 있는 네 가지 완벽한 반야 지혜, 그것은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원경지’는 이름 그대로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지혜입니다. 작은 거울은 영상이 조금밖에 비치지 않지만 크나큰 거울에는 모든 영상이 비춰집니다. 모난 거울은 한쪽만을 비출 수 있지만 둥근 거울은 사방을 다 비출 수 있습니다. 보통의 거울은 사물만 비추고 염라대왕 앞의 업경(業鏡)은 지난 세상에 지은 업만이 비추지만, 대원경에는 마음속의 생각까지도 있는 그대로 다 나타납니다. 부처님은 바로 이와 같은 ‘대원경지’를 성취했기 때문에 일체중생의 마음속 일을 동시에 다 보십니다.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전 인류, 네발 달린 짐승이나 꿈틀거리는 미물들의 마음까지도 낱낱이 비춰볼 수 있는 것입니다.


‘평등성지’는 평등한 마음으로 비춰보는 지혜, 조그마한 차별심 없이 비춰보는 지혜입니다. 해와 달은 차별없이 빛을 비춥니다. 누구는 예쁘니까 더 많은 빛을 주고, 누구는 미우니까 조그마한 빛을 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저 한결같이 빛을 주고 또 줄 뿐입니다. 부처님의 자비광명도 이와 같습니다. ‘부처님한테 벌받았다, 부처님이 특별히 복을 준다’는 등의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비광명은 조금도 모자람 없이 나에게 비춥니다.


허물은 내 쪽에 있는 것이지 부처님 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되고 안 되고의 열쇠는 내 쪽에서 쥐고 있는 것이지 부처님 쪽에서 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부처님께서 미우니까 벌을 주고 예쁘니까 복을 주는 그런 분이라면, 그것은 귀신이지 부처님이 아닙니다.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예뻐한다면 그분이 어찌 대성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평등하게 일체중생을 살펴보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며, 그와 같은 자비광명은 바로 평등성지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묘관찰지’는 과거, 현재, 미래의 아주 세밀한 것까지 남김없이 관찰하는 지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2천 5백년 전에 『화엄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한 방울의 물을 관찰하니 8만4천 마리의 벌레가 있구나, 우리의 몸에는 팔만 개의 털구멍이 있고, 하나하나의 털 구멍마다 구억 마리의 벌레가 살고 있다.”


이러한 말씀이 오늘날 과학적으로 다 입증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묘관찰지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다 꿰뚫어 보셨습니다.


『대집경』 등에는 부처님 열반에 든 뒤 5백 년이 지났을 때, 천 년이 지났을 때, 2천 5백 년이 지났을 때, 3천 5백 년이 지났을 때 어떻게 될 것이 다라는 말씀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처승이 생기고 교단이 어떻게 된다는 등의 불교 관계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일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쪽 사람이 가만히 서서 손가락만 움직이면 저쪽 사람이 죽는다.”


“겨드랑이에 날개를 붙여 하늘로 날아다닌다.”


“이제는 땅만 파먹고 살았지만 앞으로는 허공을 파먹고 사는 세상이 온다.”


“나중에 한 방울의 액체만 먹고도 살 수 있고, 팔만 펴면 그냥 날아다닐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다.”


이 예언들처럼 권총이나 레이저 광선 등이 발명 되어 서로 죽이고 헹글라이더를 타고 날기 시작했습니다. 원자, 전자를 이용하여 공기 속에서 영양분을 추출하는 작업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슈퍼맨처럼 날아다니는 세상도 왔습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묘관찰지로서 과거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도 남김없이 꿰뚫어 보고 계시며, 시방세계의 모든 국토를 남김없이 관찰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 ‘성소작지’는 짓는 바를 다 완성하는 지혜,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을 다 알게 하는 지혜입니다. 곧, 내가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지혜인 것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 지혜가 부처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중생에게도 이 지혜는 있습니다. 다만 감추어져 있어 부처님처럼 자유롭게 활용할 수가 없을 뿐입니다. 교만의 티끌 속에 묻혀 빛을 발현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교만의 먼지를 털어낼 생각은 하지 않고 아상과 인상에 얽매여 무명만 키워 갑니다. ‘나’와 ‘너’로 편을 가르고 벽을 쌓아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정녕, 아상과 인상을 내세워 무명의 업장만 키워간다면 다가오는 과보는 너무나 명백해집니다. 굳게 닫혀 있는 지옥의 문도 그 업의 힘은 능히 열 수 있습니다. 불지옥도 칼지옥도 뱀지옥도 능히 만들어냅니다. 어찌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고 늙음은 빨리 옵니다. 지금 마음을 되잡아 도를 닦지 않는다면 “제 잘난 체 안 배우고 세월만 보낸다면 병들어 신음할 때 한탄만 가득하리”라는 말처럼 결과는 자명해집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부디 아상을 버리고 공부를 시작하십시오, 하심을 하면 어느 곳에 서나 배울 것이 있습니다. 하심을 하면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참선, 기도, 경전공부! 그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티끌이 차츰 사라져 어둠은 걷히기 시작할 것이고 반야의 지혜는 발현될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니, 뒷날 후회됨이 없도록 우리 모두 정진하고 또 정진합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