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신문 아카이브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경허스님의 선밀쌍수①

페이지 정보

호수 290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1-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밀교법장담론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1-07 14:54 조회 1,101회

본문

경허스님의 선밀쌍수①

조선말 일제강점기를 앞둔 어려운 시기에 한국불교의 스승으로 시대를 이끈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 ~ 1912)가 있다. 필자는 경허를 불교로 이끈 스승 가운데 한 분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경허를 처음 만난 것은 지현의 '선으로 가는 길'에서 약간의 글을 접한 것이었지만 그 강렬한 울림은 내 삶에 큰 충격을 주었다. 경허는 선승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선 이전 화엄을 공부하고, 밀교를 익힌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경허는 1849년 전라북도 전주 자동리에서 아버지 송두옥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해 부친을 여의고, 9세 과천의 청계사로 출가하였다. 계허 밑에서 5년을 보내고, 한학을 배웠다. 동학사 만화에게 불교경론과 제자백가를 익혔다.

경허의 공부가 알려지면서 동학사의 강사로 추대되고, 많은 승려들도 모여들었다. 1879년에 옛 스승 계허를 찾아가던 중 돌림병이 유행하는 마을에서 쫓겨나 죽음 앞에 문자가 소용없음을 알았다. 동학사로 돌아와 용맹정진 끝에 누군가 소는 소로되 콧구멍 없는 무쇠소로다[牛無鼻孔]’라는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이후 경허는 선사를 자청하고 스스로 청허휴정의 11대손, 환성 지안의 7대손이라 밝혔다. 1884년 천장암에서 만공, 혜월, 수월, 한암, 만해 등 근현대 불교계 선승들을 무수히 배출하였다. 경허는 불사를 일으키고, 그로 인해 많은 선원이 건립되는 등 불교계는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경허는 57세 홀연히 박난주라 개명하고 갑산, 강계 등지에서 서당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64(1912) 4월 새벽 임종게를 남긴 뒤 병 없이 앉아서 입적하니 세수 64, 법랍 56세였다. 제자와 만해는 경허의 어록과 행장을 모아 '경허집'을 남겼다.

경허가 남긴 글과 시는 형식에 자유롭고 모든 경계를 초탈하였다. 선이 중심이 되었지만 화엄과 정토, 유가에 골고루 밝았다. 교학을 중시해 선교겸수의 기치를 세웠고 이제와 요의, 불요의를 알아 불조의 혜학에 정통하였다. 경허의 오도와 행적은 선밀겸수의 근대 조사로 일컬을 만한 흔적이 있다. 그의 오도송으로 유명한 구절은 빼놓을 수 없다.

 

有人爲戱言作牛無鼻孔        콧구멍 없는 무쇠소라는 말 장난에

因於言下悟我本心          말을 마치자 나의 본심 깨달았네.

名亦空相亦空            ()도 공하고, ()도 공해

空虛寂處常光明           공한 적정처에 광명이 나오네

從此一聞卽千悟           한 번 듣고 천 가지 이치를 깨달으니

眼前孤明寂光土           눈앞에 홀로 밝은 적광토요

頂後神相金剛界           정수리 뒤엔 신령한 금강계라.

 

콧구멍 없는 무쇠소는 지금도 선가의 유명한 화제이다. 선가는 조사의 어록을 참구하는 조사선의 전통이 있는데, 송시대 설두중현과 원오극근, 대혜에 의해 '벽암록'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무쇠소는 알음알이의 논리적 굴레를 깨뜨린다. 경허는 무수한 경권을 공부했지만 그를 오도로 이끈 것은 명상에 갖힌 무명을 비로소 벗은 것이다. 오도송에서 적광토와 금강계는 화엄과 밀교를 익힌 경허의 이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도송의 이어지는 구절은 초논리의 파격을 다시 보이는 것이다.

 

華藏刹劍樹及刀山          화장찰해는 검수지옥과 도산지옥이며

法性土朽壤糞堆           법성은 썩은 흙이고 똥 무더기이다.

大千界螘穴蚊睫           삼천대천세계는 개미굴이요 모기 눈썹이니

三身四智虛空及萬像         삼신과 사지는 허공과 만상이다.

 

경허의 깨달음은 종교적 치장의 여유도 허락지 않는다. 인간의 지극한 현실이 곧 지극한 진리가 되어야 한다. 경허는 오도 후 홍주 천장암, 서산 개심사, 부석사를 오가며 선풍을 크게 진작 하였다. 선사는 세속에 몸을 두고도 그가 있는 곳은 진토이자 진신이요, 법락의 적정처였다. 어쩌면 한국의 선밀겸수의 풍도는 경허에 의해 완성된 것인지 모른다. 오도는 결코 성불의 궁극이 아니다. 성불의 기연을 얻은 것에 불과하다. 오도의 순간 미오의 분별을 두지 않는다. 선사가 보인 인고의 수행은 다음의 게송에서 드러난다.

 

幾廻成落草             몇 번이나 누운 풀에 뒹굴었던가

鼻索實難投             코뚜레 밧줄을 떨치기 어려웠네

賴有今日事             오늘의 이 일이 있어

江山盡我收             강산을 모두 거두었다네.

 

밀교는 도량과 의궤로 이루어져 있다. 형식의 궤칙을 방편으로 두지 않으면 인간사 아사리의 부촉은 하릴 없이 흩어진다. 밀교는 먼저 혜학을 갖추고 아자관 등의 소연을 방편으로 삼아 명상(名相)의 공성을 참구한다. 밀교의 도량과 의궤, 성취법은 혜학의 기초와 수습의 이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혜학과 수행의 기초 없이 미생전본래면목의 참구부터 달려들면 무명의 욕망이 우선인 내면이라면 들판의 소처럼 먹거나 버릴 것을 알지 못한다. 경허는 사부대중에게 항마진언을 가르친 흔적이 보인다. 또한 경허는 미래 불자들에게 육자진언과 준제진언을 법어에 남겼다. 경허의 법어에서 계정혜 삼학의 균형을 고루 볼 수 있다. 경허는 복전으로서 육자진언과 준제진언을 전했다.

 

중생은 개미조차 죽이지 말고

남에게 욕하고 언쟎은 소리 말고

머리 터럭도 남의 것 훔치지 말고

조그만큼도 골내지 말고 항상 마음을

착하게 가지고 부드럽게 가지고

내 마음과 몸을 낮춰 가지면 복이 된다 하시니

부쳐님 말슴을 곶이 들을지니라

 

'경허집'의 법어는 잘 알려진 정법계진언, 호신진언, 육자대명왕진언, 준제진언의 소개로 끝을 맺는다. 진언은 세간의 복덕과 출세간 수행의 기본이 된다. 선사는 대중에게 항마진언도 가르쳤다. 선사의 선밀겸수는 다루지 않은 글 가운데 더욱 드러날 것이다. 2024년 갑진년은 청룡의 해라 말한다. 동방 목의 푸른 용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더욱 이름을 떨치고 세계에 우뚝 설 것이다. 갑진년 한국의 불교계는 할 일이 많을 것이다. 경허선사는 근대 혼란기에도 새로이 선원을 늘리는 불교의 중흥에 기여했다. 현시대가 혼란스러울수록 선사의 가르침처럼 오계를 통해 인간의 기본을 갖추는 복전을 닦아야 한다. 선사의 선밀겸수의 가르침이 더욱 필요한 시대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