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념(正念)의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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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03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16-10-07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특집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화령 필자소속 - 필자호칭 정사 필자정보 화령 정사 / 철학박사 중앙교육원장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14 10:13 조회 2,376회본문
정념(正念)의 효과
생활 중의 정념 8
화령 정사 / 철학박사 중앙교육원장
정념으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
정념은 한 마디로 지금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 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 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경전에 묘사된 것처럼 사람들의 생각은 원숭이 와도 같이 끊임없이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바쁘 게 옮겨 다니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정작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잊어버린다. 때로는 멍하니 정신 줄을 놓고 있다가 화를 당하기도 한다. 이 사회의 모든 사건 사고는 정념을 하지 못하 고 생각의 파도에 휩쓸려 되는 대로 말하고 행 동하고 생각하다가 발생하는 것들이다. 우리 마 음에 탐진치와 더불어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바 로 바라보고 그것을 제어할 수 있다면 우리의 언 행 또한 실수할 것이 없다.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생각에 휘둘리게 되는 것은 곧 괴로움을 초래하 는 것이다.
정념을 지니는 것은 흐르는 물밑에 버티고 선 바위에 비유되기도 한다. 물살이 세든 약하든 물 이 흙탕이든 깨끗하든 아랑곳 하지 않고 의연히 버티고 선 바위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도 동 요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가 정념으로서 굳건히 마음을 지 켜나간다면 세파가 아무리 거칠고 변화무쌍하더 라도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 나아 갈 수가 있다. 그렇다고 정념을 무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정념은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자기의 생각과 언행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서 자기가 현재 대면하고 있는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하여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념을 지닌 사람은 차 한잔을 마시면서도 차를 우려내고 따르며 잔에 옮겨 마 시는 모든 동작에 마음을 기울이기 때문에 차에 대한 음미도 더욱 철저하고 제대로 차 맛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차를 마시면서도 지나간 일을 걱정 하고 앉았거나 해야 할 일 때문에 마음을 쓰다보 면 차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면서도 거기에 마음을 쏟 고 있는 듯이 보여도 실은 생각이 다른 데에 가 있 는 경우가 많다. 밥을 먹으면서 신문을 보고 텔레 비전 소리를 듣고 있으면서 동시에 3가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한 가지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 전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렸을 때는 학교 다니는 것이 지겨워 빨리 졸업하고 사 회로 나가고 싶어하지만 사회에 나와서는 그 시 절을 다시 그리워한다.
애들을 키우는 부모들도 애들이 어릴 때는 같이 놀아주고 성장을 지켜봐 줘야 하는데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애들에게 잘 해줘야지 하는 생각으로 맞벌이를 한답시고 애들 에게 소홀히 하다가 애들이 큰 다음에야 그 시절 을 그리워하고 어릴 적 같이 못 놀아 준 것을 후 회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 상 그 때를 지켜보지 못하고 지나 놓고는 그 시절 을 후회하고 닥치지도 않은 일을 지레 걱정하면 서 세월을 보낸다. 그래서 나온 말이 조주 선사의 ‘정간백수자(庭間栢樹子;발 밑의 잣을 보라)’라는 고사이다.
정념을 지닌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기 때문에 삶의 질도 거기에 따라 향상될 수 있다. 멍 하니 있는 것이 정념이 아니라 생각생각을 분명 히 하고 지금 여기에 마음을 기울이고 알아차리 기 때문에 망념에 끄달려 괴로움을 초래하지 않 는다. 떨어지는 물방울, 나뭇잎사귀의 흔들림에도 우 주의 신비함을 볼 수 있는 것이 정념을 지닌 자 의 모습이다. 다시 말하자면 생명의 아름다움을 매 일각 마다 명료하게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정 념인 것이다.
정념은 번뇌를 제거하여 열반에 이르게 한다
불교의 수행은 지(止)와 관(觀)을 닦는 것으로 정념은 지와 관을 성취하게 하며 수행자로 하여 금 선정에 깊이 들어 지혜를 내관할 수 있게 한 다. 사념처의 모든 방법은 지와 관의 수행을 포함 하고 있으며 사념처를 닦는 것은 곧 지와 관을 닦 는 것이기 때문에 사념처와 지관의 수행은 불가 분의 것이다. 정념은 마음을 수행의 대상에 집중하게 하여 움직이지 않게 함으로써 선정의 목표에 도달하 게 한다. 이때 정념은 마치 문지기처럼 우리의 마 음을 감시하고 보호하여 마음이 수행의 대상에서 멀어져 망상 가운데에 떠다니지 않게 한다.
동시 에 바깥에서 잡념이 들어와 마음을 교란하게 하 는 것도 막는다. 이것이 바로 지이다. 또한 정념은 수행 과정에서의 모든 현상을 관 찰하고 알아차리며 살피게 하여 그것의 본질을 명료하게 알아차리게 하여 지혜를 드러내게 하 는데 이것이 관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 상황에 직면 하게 된다. 온갖 유혹과 욕심, 사견 등에 휘둘리 게 되는데 이때 정념은 차를 모는 운전기사와 같 다. 도로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정신을 바 짝 차리고 있으면 안전운행을 할 수 있지만 전날 밤 술을 마셨다거나 수면부족으로 몽롱한 정신상 태라든가 머릿속이 잡념으로 가득하면 사고가 일 어날 확률이 많다. 정념은 맑은 정신으로 운전에 집중하는 기사처 럼 일상생활에서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바르게 대처할 수가 있다.
모든 상황에 대하여 그것을 바 로 알아차리고 바라보기만 하면 그것의 본성을 통찰하여 흔들리지 않게 된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말 라.”고 하신 말씀이다. 정념은 삼루(三漏)를 없앤다. ‘루’라는 것은 번 뇌의 다른 이름으로 지혜가 부족하여 본래 청정 한 자성이 더러워져서 번뇌가 일고 청정한 지혜 가 흐려지는 것을 말한다. 삼루라는 것은 여기에 3가지가 있다는 의미인데 욕루(欲漏), 유루(有漏) 와 무명루(無明漏)가 그것이다. 욕심이 끝이 없이 일어나 늘 만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 욕루이다.
지혜 가 부족하여 욕망을 쫓으며 업을 지어 괴로움을 받는 것이 유루이다. 무명루라는 것은 마음이 겹 겹의 어리석음에 덮여 끊임없이 번뇌를 만들어내 는 것이다. 마음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실념하 게 되면 여러 가지 속박에 얽매인다. 그 속박, 즉 번뇌의 근원이 바로 우리 자신이 기 때문에 정념을 갖추게 되면 번뇌의 근원을 바 로 볼 수 있게 되고 그것을 변환할 수 있다. 정념 의 광명이 비추게 되면 번뇌의 어두움은 사라진 다. 우리가 해탈을 하고 열반을 얻는 것은 무수한 번뇌를 단절하고서야 비로소 획득되는 것으로서 번뇌가 없다면 해탈도 없다. 불교에서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번뇌투성이 인 인간으로서의 몸을 받았을 때 더욱 정진하여 보리를 얻어야 한다.
사념처 수행은 열반의 유일한 길
세상만물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 다. 그것이 제행무상이다. 우리도 제행무상의 진 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태어난 이상은 언젠 가는 죽어야 한다. 그러나 죽는다고 끝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죽은 다음에도 업에 따라 육도윤회 를 한다고 한다. 불교의 최종 목표는 윤회의 괴로 움을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이고득락(離 苦得樂)’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괴로움 중에서도 생사의 괴로움이 가장 크다.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하면 이고득락은 불가능하다. 정념은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에 따르는 온갖 번뇌를 없애주며 죽음에 수반하는 여러 가지 혼미한 감정에서 해탈하게 하며 생명의 실상을 통찰하게 한다. 정념에 의하 여 생사일여의 진리를 바로 볼 때에 이고득락이 가능해진다.
불교에서는 임종 직전의 찰나의 한 생각이 내 생을 결정하는데 크게 작용한다고 믿는다. 살면 서 비록 많은 선행을 했을지라도 임종 직전의 일 념이 건전치 못하면 다음 생에서 괴로움을 초래 하게 된다. 비록 수행을 하고 많은 복덕을 지었더 라도 임종 직전에 어떤 계기로 진심을 내거나 마 음이 흐트러지면 삼악도에 떨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사는 동안에 큰 선업은 못 지 었더라도 임종 직전에 불법의 이끌림으로 삼보에 귀의하고 지극한 참회로 그 순간을 맞는다면 좋 은 곳에 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임종 직전에 맑은 정신과 정념 을 지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임종 직 전의 정념이 중요하지만 이는 평소에 닦아 놓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평소에 정념 수행을 꾸준 히 한 사람이라면 임종 직전에 어떠한 상황이 닥 쳐도 동요되지 않고 정념을 유지한 채 죽음을 맞 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평소에 그런 수행 이 안 된 사람이 임종 직전에 선념을 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정념 수행은 살아서도 번뇌에 이끌리지 않고 괴로운 삶을 살지 않게 하지만 궁극의 목적은 생 사를 초월하여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념을 기르는 것은 세계의 실상을 바로 보고 번 뇌의 원인을 통찰하여 집착과 진에, 어리석음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사념처를 닦는 것은 곧 정 도에 이르는 것이며 정도는 곧 중도이니 이것이 바로 팔정도이다. 사념처 수행이 있어야 팔정도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으며 팔정도를 제대로 닦은 다음에야 열반 을 증득할 수 있기 때문에 사념처는 곧 열반의 문 턱과 같은 것이며 기초가 된다. 《대념처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청정 하게 하며 근심과 슬픔을 떠나게 하며 괴로움과 번민을 멸하고 정도와 열반을 성취케 하는 유일 한 길이 사념처’라고 하셨다. 그만큼 사념처를 통 한 정념 수행은 불자들이 가야할 유일한 길이며 반드시 가야할 길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평생을 두고 정진하여야 한다. 이 생에서나 저 생에서의 안락을 위해서도 정 념 수행은 필요하지만 이 생도 저 생도 다 버린 육도윤회의 해탈을 위해서도 사념처를 통한 정 념 수행은 필수적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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