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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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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11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09-02-02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설법/경전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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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21 05:01 조회 2,40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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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여울

모든 것은 자성 이 없다

문수보살이 각수 보살에게 물 었다

“마음의 본성은 하나인데 어째서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차별이 있습니까? 행복한 사람도 있고 불행한 사람도 있 으며, 이목구비가 제대로 된 사람도 있고 불구자도 있으며, 잘생긴 사람도 있보, 못생긴 사람도 있으며, 괴로워하 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즐거워하는 사 람도 있습니라. 그리고 안으로 살펴보 면 업은 마음을 모르고 마음은 업을 모릅니다. 느낌은 그 결과를 모르고 그 결과는 느낌을 모릅니다. 마음은 느낌을 모르고 느낌은 마음을 모릅니 다. 인연은 연을 모르고 연은 인을 알 지 못합니다.”

각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보살은 잘 물으셨습니다. 나는 사실대로 말씀드 리겠습니다. 모든 것은 자성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 고 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무엇 이건 서로 알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시냇물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그 한 방 울 한 방울은 서로 모르는 것과 같습 니다. 또 타오르는 불길은 잠시도 멈 추지 않지만 그 속에 있는 불꽃끼리는 서로 모르듯이 모든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과 귀. 코. 혀. 몸과 생각이 고통을 받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떤 고통도 받고 있지 않습니다. 존재 그 자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지만 나타 난 쪽에서 보면 항상 움직이고 있습니 다. 그러나 사실은 나타난 것에도 자 성은 없습니다. 바르게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모든 것에는'차성이 ‘ 없다는 것을 알게 돨 것입니디. 이러 한 마음의 눈은 청정하고 불가사‘의합 니다. 그러므로 허망하다거나 허망하 지 않다거나 진실하지 않다고 하는 것 은 거짓 이름에 불과합니다.”


그대 어째서 아직도

많은 사람이 부처님 법 안에서 도를 이루었는데, 그대는 어째서 아직도 고 해에서 헤매고 있는가. 그대는 시작없 는 옛적부터 이 생에 이르도록 깨달음 을 등지고 티끌에 묻혀 어리석은 생각 에 빠져 있구나. 항상 악업을 지어 삼 악도에 떨어지고 착한 일은 하지 않으 니 생사의 바다에 빠진 것이 아닌가. 몸은 여섯 도둑서물질, 소리, 냄새, 맛, 촉감, 의식 대상 즉 육경을 말한다. 중 생의 수행을 방해하며 번뇌늘 일으키 므로 도적에 비유을 따라 악도에 떨어지니 고통이 극심하고, 마음은 일승법 처부처님의 교법,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된다고 하는 최고의 가르침)을 등지니 사람으로 태어나도 부처님 나시기 전이거나 그 후일 수밖

에 없다. 이제 다행히 인간으로 태어 나기는 했지만 부처님이 안 계신 말세 이니 슬프다, 이것이 누구의 허물인가.

그러나 그대가 이제라도 반성하여 애욕을 끊고 출가하여 티끌 세상에서 벗어나는 진리를 배운다면 마치 용이 물을 만난 듯, 범이 산에 의지한 듯하 여 그 뛰어난 도리는 말로 다할 수 없 다. 사람에게는 과거와 현재가 있으나 법은 멀고 가까움이 없고, 사람은 어리 석고 지혜로움이 있으나 도 는 성 하고 쇠함이 없다. 설사 부처님 생존시 에 태어났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무엇이 이로우며, 말세 를 만났더라도 부처님의 교법을 받들 어 행한다면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의사와 같아 병에 따라 약을 주 지만 먹고 안 먹는 것은 의사의 허물 이 아니다. 듣고도 가지 않는 것은 길 잡이의 허물이 아니다.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방법이 모두

갖추어 졌으니, 가령 내가 오래 살더라 도 별다른 이익이 없을 것이다. 이제부 터 내 제자들이 차례차례 받들어 행하 면, 여래의 법신은 항상 머물러 없어지 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치를 안다면 자신이 도를 닦지 않는 것을 한탄할지 언정 어찌 말세라고 걱정할 것인가.

간절히 바라노니, 그대는 모름지기 굳은 뜻을 세워 활짝 열린 마음으로 여러 가지 반연을 쉬고 뒤바뀐 생각을 버려라. 참으로 죽고 사는 이 큰 일을 위해 조사의 화두를 자세히 탐구하라. 그래서 철저하게 깨닫는 것으로 근본 을 삼아야 한다. 자기는 감당할 수 없 는 일이라 하여 물러서서는 안 된다.

이 말세에 부처님이 떠나신 지가 오 래 되니 마군은 강하고 불법은 약하며 옳지 않은 사람이 많아, 남을 이롭게 하는 이는 적고 잘못 되게 하는 이가 많으며, 지혜로운 이는 드물고 어리석 은 이가 많다. 스스로 도를 닦지 않으 면서 남까지 시끄럽게 하니, 수행을 방해하는 일을 말로는 다할 수 없다.


한 물건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 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찍이 나지도 않 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 고 모양 그릴 수 없다.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옛 어른은 이 렇게 노래했다.

옛 부처 나기 전에 의젓한 둥그러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

이것이 한 물건의 나지도 않고 죽지 도 않으며, 이름 지을 길도 모양 그릴 수도 없는 연유다. 육조  스님이 대중에게 물었다. “내게 한 물건이 있 는데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 너희 들은 알겠느냐?” 신회  선사가 곧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 요 신회의 불성입니다.” 하였으니, 이 것이 육조의 서자 가 된 연유다.  선사가 숭산 으로부 터 와서 뵙자 육조스님이 묻기를 “무 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할 때에 회양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다가 팔 년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가령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맏아들이 된 연유다.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출현하심은 마치 바람도 없는데 물결을 일으킨 격 이다. 세상에 출현한다는 것은 대비심 으로 근본을 삼아 중생을 건지는 것을 - 말한다. 그러나 한 물건으로써 따진다 면, 사람마다 본래 면목이 저절로 갖추 어졌는데 어찌 남이 연지 찍고 분 발 라 주기를 기다릴 것인가. 그러므로 부 처님이 중생을 건진다는 것도 공연한 짓인 것이다. 억지로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 마음이라 부처라 혹은 중생이라 하지만, 이름에 얽매여 분별을 낼 것이 아니다. 다 그대로 옳은 것이다. 한 생 각이라도 움직이면 곧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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