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 보살의 참마음, 옴마니반메훔에 의지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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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11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09-02-02 신문면수 12면 카테고리 기획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윤우채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21 05:48 조회 2,474회본문
13년간 총무, 우담바라회 이끌며 봉사와 전법
끼니때가 되면 식구들 밥짓는 일 만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한 달이면 쌀이 한 가마. 큰 가 마 솥 모양새라 해서 붙여졌다는 부산 이라는 지명이 떠올려 졌다.
부산 태생인 남편은 9남매의 장손이 었다. 결혼 몇해 전 부친이 작고해서 동생들 건사는 고스란히 남편 몫이었 다. 남편은 국제시장 한 켠의 스텐공 장에서 밤낮으로 일했다. 시어머니와 시동생들 그리고 슬하에 자식 넷 뒷바 라지에 하루 해가 모자랐다.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었 다. 흔들릴 때마다 부처님을 찾았다. 넝쿨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식구들의 무사안녕을 간구했다.
“불교는 의지하는 거죠”
그랬다. 그는 무엇이든 관세음보살 의 참마음 ‘옴마니반메훔’에 의지했 다. 그것은 간절한 신앙심의 발로이기 도 했다. 그런 차원에서는 불교를 얼 마나 잘 알고, 많이 알고는 이미 문제 가 안되었다.
9남매 장손집 며느리
성화사 오순자(65, 법명 : 정도심 려6) 보살. 보살은 9남매 중 장손의 아내로, 며느리로, 그리고 어린 시동생 들과 자식들을 장성할 때까지 보살펴 온 자애로운.큰 어머니로 살았다.
관세음보살의 화현 중에 송자관음 이란 분이 있다. 보톻은 아 이들을 안고 있거나 감로수로 아이의 기갈을 달래주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정도심 보살이 수많은 아이들을 보 살피고 은덕을 베풀어 준다는 그 송자 관음은 아닐까.
정도심 보살은 원정대종사가 열반한 1980년 총지종과 인연됐다. 원 래' 병약했던 맏딸이 열 살을 전후해 영문 모르게 시름시름 앓았다. 금지옥 엽같은 딸아이를 잃을까봐 보살은 전전긍긍했다. 이름난 병원과 갖가지 방책을 써봤지만 백약이 무효 였다. 그러다가 친정 여동생이 다니던 부산 동래 정각사를 찾게 되었다. 당 시 정각사 정각원 스승님은 “부처님이 좋은 음식을 차려줄 수는 있지만 먹고 안먹고는 본인이 할 나름이다. 진수성 찬이 있어도 떠먹지 않으면 무소용이 다. 내 손으로 내 입에 떠넣어야 내 배 가 부른 이치처럼 피나는 자기수행이 있어야 한다”고 짧지만 명확하게 일갈 했다.
그 며칠 후 보살은 집과 가까운 성 화사를 다니기.시작했다. 일년을 하루 같이 절을 찾아 일구월심 맏딸의 쾌차 를 기원했다. 병세는 차츰 호전되었다. 딸은 그렇게 심신의 건강을 되찾아 갔 고 어머니만큼 신심있는 교도가 되었 다. 그리고 그 맏딸은 지금 마산 운천 사에서 마음과 몸이 아픈 사람들을 보 살피는 스승의 길을 걷고 있다.
사위는 오랜동안 종단의 중책을 맡
고 있는 인선 정사다. 사위도 자식이 랄 수 있는데 자식 둘을 수행 길로 보 낸 부모 마음이 그런 것일까. 정도심 보살이 눈물을 훔쳤다.
맏딸, 스승의 길로
“집안에 스승님이 나오려면 7대가 공덕을 지어야 한다죠. 경사스런 일인 데 마음으론 늘 눈물이 납니다. 중생 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면 고행난행 길도 마다해선 안되잖아요. 그 길을 헤쳐 나가려면 얼마나 힘이 들까요...”
정도심 보살은 지난 ’ 82년부터 성화 사 총무를 13년간을 했다.
재임중에는 봉사모임인 우담바라회 를 이끌며 곳곳에 부처님의 말씀을 전 하고 실천하기도 했다. 당시 지금은 사돈지간인 정정심스승을 그 림자처럼 시봉하며 절과 교도들을 위 해 헌신했다.
“지금 생각하면 집안과 절 살림을 어떻게 꾸렸는지 모르겠어요. 자질이 나 여건이 되지 않았지만 부처님이 시 킨 일이라 여기고 힘들어도 인욕하며 살았습니다.” -
총무 소임을 살면서 남의 집에서는 밥도 못먹을 정도로 내성적이던 성격 이 활달하고 시원하게 바뀌었다고 한 다. 대중화합을 위해 우스갯소리도 마 다하지 않는다고. 집안의 안주인 보살 이 밝고 긍정적으로 변해가자 자연 가 족들도 동화되어 갔다.
남편 이학렬(68) 각자는 보살의 든 든한 도반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사업 에 바쁜 연고로 절에 자주는 못오지만 매월 있는 단월회 모임만은 빠지지 않 는다.
두 아들은 어려서부터 자성학교를 다녔고, 괴산 수련회 자원봉사를 자청 해서 했다.
시어머님과 시누이, 동서도 보살을 따라 진언행자가 되었다. 시어머님은
4년 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성화사에 서 정시불공을 지켰다.
이렇게 정도심 보살이 부처님 법을 만나 자신을 제도하고, 가족을 제도하 고, 여러 교도들을 제접할 수 있었던 힘은 송하, 법공, 정정심, 지광 스승같 은 훌륭한 분들의 인도가 있었기에 가 능했던 일이었다.
365일 부처님과
“불법 만나고 좋은 스승님 가 지극히 어렵다는데 그런 저는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지광 주교님께서 강조하시는 버리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을 새기고 있어요. 정사님은 부임 이 후 만다라, 득락전 미타삼존 봉안 같 은 대작불사는 물론 쉼 없이 온 도량 을 가꾸면서 행동으로 보여 주시는 분이시죠”
정도심 보살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서원당을 찾는다고 한다. 가늘게 내리던 빗소리가 굵어졌 다. 보살의 모습이 차분하고 담담해 보인다. 보살의 마음은 지금 어디쯤 머물고 있을까. 삽십년 전 병든 딸을 품에 안고 성화사를 처음 찾아왔던 그 간절한 첫 마음에 있지는 않을까.
부산 윤우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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