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는 일과 비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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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8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11-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설법 서브카테고리 왕생법문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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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11-02 14:11 조회 1,329회본문
채우는 일과 비우는 일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생에 집착하고 삶을 소유물처럼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에 대한 집착과 소유의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엄연한 우주질서 앞에 조금도 두려워 할 것 없을 것 입니다.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이기에.
해가 넘어간 뒤 땅거미가 질 때까지 그 저녁놀의 잔영을 우리는 언제나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여리고 순하디 순한 빛깔을! 사람의 마음을 빛깔로 표현할 수 있다면 착하고 어진 사람들의 마음이 그런 빛깔을 띠고 잊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어떤 세월 속에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은 한결같건만 우리는 이제 그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려면 고요한 침묵이 따라야 하는데 시끄러움에 중독된 이 시대의 우리들이 그 침묵을 익히려면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홀로 있을 만하면 초라한 자기 모습이 드러날까 봐서인지 바깥 소리를 찾아 이내 뛰쳐나가 버립니다. 침묵을 익히려면 밖으로 쳐다보는 일보다는 안으로 들여다보는 일을 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질보다는 양을 내세우는 오늘의 이 땅 위에 우리들, 그러기 때문에 항상 무엇인가를 채우려고만 하지 비우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텅 빈 마음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텅 비워야 메아리가 울리고 새것이 들어찰 수 있습니다. 온갖 집착과 굳어진 관념에서 벗어난 텅 빈 마음이 우리들을 가장 투명하고 단순하고 평온하게 만듭니다.
불가(佛家)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진리를 배운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배우는 일이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림이다.
자기를 잊어버림은 자기를 텅 비우는 일.
자기를 텅 비울 때
체험의 세계와 하나가 되어
모든 것은 비로소 자기가 된다.”
즉, 자기 마음을 텅 비울 때 본래 적인 자아, 전체적인 자기가 통째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또한 자기 존재를 마음껏 전개하는 일입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기 어려운 오늘 같은 세상에서 우리들이 사람의 자리를 지켜나가려면 하루 한 때라도 순수한 자기 자신을 존재케 하는 새로운 길들임이 있어야 합니다. 얽히고설켜 복잡하고 지저분한 생각이 죄다 사라져 버린 순수 의식의 상태, 맑게 갠 날 해가 진 뒤의 그 순하디 순한 놀빛 같은 무심이 일상에 찌든 우리들의 혼을 맑게 씻어 줄 것입니다.
가득가득 채우려고만 하던 생각을 일단 놓아버리고 텅 비울 때, 새로운 눈이 뜨이고 밝은 귀가 열릴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영역은 전체에서 볼 때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존재의 실상을 인식하려면 눈에 보이는 부분과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두루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육지를 바로 보려면 바다도 함께 보아야 하고, 밝은 것을 보려면 어두운 것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친구를 바로 이해하려면 그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불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그 힘을 제대로 쓸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 힘을 바람직한 쪽으로 잘 쓰면 얼마든지 창조하고 형성하고 향상하면서 삶의 질을 거듭거듭 높여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생명력을 가지고도 한 생각이 비뚤어져 잘못 써서 버릇이 되면 그것이 업력이 되어 마침내는 자기 자신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이 끝없는 구렁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똑같은 생명력이라도 서로 다른 지배를 받아 한 장미나무에서 한 갈래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고, 다른 갈래는 독이 밴 가시로 돋아납니다. 도덕성이 결여되었거나 삶의 목적에 합당치 못한 일은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늘어놓는다 할지라도 올바른 결과는 가져올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하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가 의식을 하건 안 하건 둘레의 대기에 파장을 일으켜 영향을 끼칩니다. 착한 생각과 말과 행동은 착한 파장으로 밝은 영향을 끼치고, 착하지 못한 생각과 말과 행동은 또한 착하지 못한 파장으로 어두운 영향을 끼칩니다. 사람은 겉으로는 강한 체 하지만 속으로는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또한 다른 사람의 상처를 건드려 고통을 주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내게 주어진 그 생명력을 값있게 쓰고 있는지 아니면 부질없이 탕진하고 있는지 되돌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삶의 양을 따지려면 밤낮없이 채우는 일에만 급급해야겠지만, 삶의 질을 생각한 다면 비우는 일에 보다 마음을 써야 할 것입니다.
깊어가는 가을밤, 풀벌레 소리에 귀를 모으면서 오로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 봅시다.
총기 32년 10월 이달의 설법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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