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언과 차별 희사로 생활의 지혜를 만들다
페이지 정보
호수 219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18-02-01 신문면수 7면 카테고리 총지사 신행체험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성민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김성민 보살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17 10:16 조회 3,096회본문
총지종과 제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가 된 데에는 어머니의 덕과 공이 제일 큽니다. 어릴 때에 어머니의 몸이 약하고 좋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건강 과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불공을 하였습 니다. 저 역시도 어린 마음에 엄마의 몸 이 많이 나빠지면 혹시나 계모가 들어오 지는 않을까, 계모가 들어오면 행여나 나 와 형제들을 힘들게 하지는 않을까, 라는 걱정에 휩싸여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어머니를 따라 절에 들락거렸습니다. 그 때가 초등학교 사학년 때였는데 해가 뜨 지 않은 이른 시각에도 어머니의 손을 잡 고 새벽 불공을 따라다녔던 기억이 납니 다. 어머니가 서원당에 가는 것을 따라가 고, 불공을 하는 것을 따라하다 보니 총 지종 생활은 자연스럽게 저의 생활이 되 어버렸습니다.
사실 초기에는, 교리도 제 대로 깨우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인품 좋은 스승님과 성격 좋은 다른 보살님들 과 함께 어울려 놀러 다니고, 수다를 떠 는 게 재미있어서 부지런히 절에 나갔습 니다. 어머니는 제가 절에 다니는 걸 무 척이나 흡족해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신 발 닳는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서원당에 나가고, 서원당에서 시키는 건 뭐든지 열 심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남을 먼 저 배려하고, 헌신적이며, 마음이 착한 어머니의 말씀이니 더욱 기쁜 마음으로 어머니의 바람을 따랐습니다. 설법시간에 들었던 교리를 몸소 실천 한 일도 있었습니다. 운전기사를 직업으 로 삼으려던 아버지가 버스 노선 하나를 따기 위해 회사를 찾아다니던 때였습니 다. 길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 복판에 오천 원짜리 다발 이 놓여있었습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오 천원 다발이면 꽤 큰돈이었습니다. 돈을 주울까, 어떻게 할까, 망설여지기는 했지 만 문득 복지화 스승님이 설법 중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절대로 남의 물건 을 탐하는 일은 하지 말라던 문장이 바로 귀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생생히 들 렸습니다. 주인을 찾아주기에는 시간이 마땅치 않기도 했고, 뭔가 께름칙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복지화 스승님의 말씀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우리는 주인이 아 니니 건드리지 말자.’ 라며 아버지와 같 이 집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집에 와서 는, 땅을 판다고 십 원이 나오는 것도 아 닌데 참 아까운 돈을 눈앞에서 놓친 것 같다는 후회가 들기도 했습니다.
다시 그 길에 가서 아직 돈이 있는지 확인을 해보 는 게 좋을 것 같냐고 부모님께 묻자 아 버지는 그 돈으로 무엇을 사고 싶냐고 물 었고, 어머니는 그저 웃기만 했습니다. 가지고 싶은 것이 딱히 있던 것도 아니었 고, 적지 않은 돈이 아직 길에 남아있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 로 했습니다. 돈이 아깝기는 했지만 마음 은 이상하게 편했습니다. 그런 대로 지내 는데 얼마 안 있어 누군가가 학교 등록금 을 잃어버렸다는 소문이 돌면서 대대적 인 수사를 벌여 범인을 잡았다는 이야기 까지 들었습니다. 잃어버린 돈이 찾아진 건 참 다행인 일이었으나 만일 내가 당시 탐심을 부려 주인 잃은 돈에 손을 대었다 면 어떤 창피와 부끄러운 상황에 처해졌 을 지를 상상하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날 아버지가 면접 본 버스 회사에서 아버지를 채용하겠다는 통보 를 받았는데 이는 아마도 탐심을 부리지 않은 저와 아버지에 대한 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버지도 길 위의 돈을 건드리 지 않기를 잘한 것 같다며 첫 월급의 많 은 부분을 제게 주며 희사를 해달라고 부 탁하였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가방끈이 짧은 것을 평생 애석하게 생각하였는데, 그 때문인 지 자식들의 교육에 누구보다 정성을 들 였습니다. 실제로 저희 형제들은 외국에 나가서 석사나 박사 학위를 따고 유학을 하는 등의 성과가 꽤 있었습니다. 어머 니는 공부가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기도 했지만, 집안에 자신의 공부를 지지해주 는 어른이 한 분도 계시지 않았다고 합니 다.
가까스로 야학을 다니며 한글을 깨쳤 음에도 언제나 공부에 대한 갈증을 호소 하던 어머니였습니다. 얼마 전, 어머니가 토지를 조금 물려주셨는데, 그게 영 팔리 지를 않았습니다. 서원을 해도 마땅한 임 자가 나타나지를 않아 며칠을 골똘히 생 각한 끝에 어머니의 평소 학구열이 반영 된 대책을 떠올렸습니다. 바로 동해중학 교에 땅을 기증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기 증 후 오래지 않아 땅값이 올랐다는 소식 을 들었습니다. 이는 옳은 방향으로 어머 니의 재산이 쓰였다는 것의 반증이나 다 름없었기에 무척 뿌듯하고 또 감사했습 니다. 이로써 세상의 이치를 하나 더 알 게 되었습니다.
첫째, 어머니의 아픈 지 난날이 있었기에 저와 저의 형제들이 이 렇게 공부를 할 수 있고 부족하지 않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둘째, 어머니가 물려주신 재산을 어머니의 종교관과 바 람대로 쓰는 게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었 다는 것. 셋째, 바로 그러한 결정은 어머 니의 배움을 받고 종교를 물려받은 제가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행하였다는 것. 이 것은 베푸는 순환이었습니다. 복지화 스승님이 매번 강조한 말이 있 습니다. 은혜는 평생을 잊지 말고, 수원 은 일시라도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어 머니 역시도 늘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려 고 애써야 한다고 당부하였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의미를 언제 어디서라도 가슴 에 품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괜한 탐심이나 미움, 원망도 수그러들 뿐 아니 라, 마음이 관대해지고 평화로워 지는 것 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좀처럼 불안하거나 안정적이지 못할 때 에는 진언과 함께 차별 희사 하나면 만사 가 해결이 된답니다. 어머니를 따라 총지 종을 다니게 된 이래로, 극적인 입교 계 기도 없고 또 극적인 인생 역전의 장면도 없는 것만 같지만 일상에 스며든 총지종 의 교리와 귀중한 설법이 생활의 지혜가 되고 제 삶의 나침반이 되었다고 생각합 니다. 늘 그랬듯 탐심에 흔들리지 않고, 순간순간을 감사히 여기며 순리대로 살 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