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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호국신앙의 발원지 황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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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28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10-07-09 신문면수 12면 카테고리 기획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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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23 05:12 조회 1,80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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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호국신앙의 발원지 황룡사
신라 삼보 중 장육존상, 9층대탑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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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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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에 드러난 주춧돌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 때 중국 오 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접견한 자장스 님은 갑자기 나타난 신인으로 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 라가 항복하고 9개국의 야만족이 와 서 조공을 바치며 왕업이 태평할 것이요.”

선덕여왕 12년 에 귀국한 자장 스님은 즉시 여왕에게 황룡사에 9층 1 대탑을 세울 것을 간언한다.

신라조정에서는 조각계의 명장인 백제의 아비지를 초청하여 이백 여 명의 장인과 함께 탑을 완성하였다. 이때가 646년(선덕여왕 15)으로 신라 의 가장 귀중한 보물 중의 하나인 황 룡사 9층목탑이 완성된 것이타.

각각 제1층은 일본 , 2층은 중화 , 3층은 오월 , 제4층 은 탁라 , 제5층은 응유 , 제6층은 말갈 , 제7층은 거란  , 제8층은 여진 , 제9층은 예맥 을 의미한다.

황룡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9층 목탑지에는 지금은 초석만 남아 과 거 영광을 말해주고 있다. 각 초석은 지름이 약 1미터 내외로 사방에 8개 씩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으며, 그 가 운데 심초석(중심 기둥의 받침돌)이 있다. 이 탑은 문헌에 따르면 탑신부 약 65미터, 상륜부 15미터로 전체 80 미터에 이르며, 지금으로 치면 아파 트 25층 정도의 높이가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의 기둥 속에는 자장 스님이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 신사리 등을 봉안했다고 한다.

탑지를 발굴한 결과 건물터의 크기 는 가로 세로 29끄이고 사방 7칸씩으 로 모두 64개의 장대한 초석과 한 복 판에 심초석이 드러났다. 이러한 건

물터의 규모나 초석 배열로 미루어 높이 80m 의 탑은 문헌의 과장이 아 닌 실제로 존재한 탑이었음이 확인 된 것이다.

9층 목조탑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 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앙 심초석 위로 심주가 노반까지 뻗어 올라가 고 이 심주를 주변 기둥과 보가 각 층에서 붙잡아 주는 것이었다고 짐 작된다. 외관은 9층의 기와지붕이 중 첩되고 꼭대기에는 상륜이 높이 솟 아 도성 경주 어디서나 바’라다 보이 는 상징물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탑은 이후 여러 차례 수리 를 거치면서 경주의 상징물로 남아 있다가 13세기 몽고의 침입 때 소실 되었다.

황룡사지에는 백제사람 아비지가 국경을 초월해 서라벌 터전 위에 제 일의 목탑을 이룩한 것에 대한 기념 비가 세워져 있다.

황룡사 9층목탑을 세운지 23년 후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였다. 신라 멸 망 후에도 황룡사는 고려 왕조에 이 어져 깊은 숭상과 보호를 받았으며 9 층탑의 보수를 위해. 목재까지 제공 받았다. 그러나 1238년  몽 골군의 침입으로 탑은 물론 일체의

건물이 불타 없어졌다.


황룡사 장육존상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 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불상이다. 신 라 국찰  황룡사에서 주조하였 던 신라 삼보 의 하나인 이 불 상은 고려 때 몽고의 침략으로 흔적 조차 없어지고 현재는 이를 받치던 석조대좌만 황룡사 금당지 

에 남아 있다.

황룡사지 입구에 있는 우물터를 지나면 장육존상이 있던 곳이 보인다.

황룡사 장륙존상은 573년(진흥왕 34년) 10월 17일에 조성하기 시작해 서 그 이듬해인 574년 3월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국유사에 인도의 아쇼카왕 이 보낸 황 금과 동으로 모형 석가삼존상을 본 보기로 삼아 문잉림 에서 장 륙존상을 단번에 주조하였다는 기록

이 전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아소카 왕이 석가삼존불을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인연이 있는 국토에 서 장육존상이 조성되기를 축원했다 고 한다. 이에 황금 3만 분과 황철 5 만 7,000근, 석가삼존의 모형을 배에 실어 바다로 띄웠는데 경주에 이르 러 574년에 불상이 완성되었다 한다. 이 장육존상은 이듬해 왕이 돌아갈 것을 미리 알고는 눈물을 발꿈치까 지 흘려 땅을 1척이나 적셨다고,.한 다.

현재 금당지에는 장육존상과 두 개 의 협시불을 모셨던 대좌석이 남아 있다. 또한 이들 삼존불 대좌석 동서 쪽에 나한상, 천왕상 등이었을 것으 로 추정되는 14개의 불대좌석의 흔 적이 남아있다.

’ 황룡사 금당지 중심부에는 자연석 으로 된 큰 돌이 세 개 남아 있는데, 그 모양과 크기로 보아 장육존상은 입상으로 그 높이가 5미터 안팎이었 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륙존상의 무게는 3만 5007근인데 황금이 1만 198분 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136분이 들었다고 할 만큼 거구의 금 동삼존불상으로 파악된다. 장륙존상 의 높이가 1장 6척이므로 4.5〜501 사 이의 우람한 상이 될 것이다.

삼국유사 기록대로 석가삼존상 으로 중앙에 석가불, 좌우 에는 문수  - 보현 보살로 생각된다.

이 불상은 1238년 몽골 침입 때 완 전히 소실되었기 때문에 그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인도의 아소카 왕이 불 상의 견본을 보냈다 기록도 있는 것 으로 보아 어느 정도 이국적인 불상 양식을 반영한 모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불상의 양^은 거의 알 수 없지 만 일단 전 황룡사금동불입상과 비슷한 양식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 양식은 중국의 북위말

이러한 양식에 북제  - 북주 세토)의 특징을 가미한 불상 양^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면 전황룡사금 동불입상보다는 다소 진전된 %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쇼 카왕이 석가삼존상 모형을 보냈다는 전설을 고려한다면 인도의 굽타 양 식 불상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인도적인 ,특징을 찾아낼 수 없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 6세기 후반기 에 새로 유입된 굽타  불상의 영 향을 농후하게 받아 제작되는 작품들 도 더러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 도 조심스럽게 고려해야 될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대좌는 장륙존상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유품이다. 자연 그대로 생긴 바위의 윗면을 일 단 평평하게 고른 뒤 장륙상의 발이 들어갈 수 있게 홈을 파고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킬 수 있는 꼭지의 홈 도 팠다. 앞부분이 넓고 뒤로 갈수록 좁은 형태이다. 이러한 모양은 좌우 협시대좌도 거의 비슷한 편이다.

‘신라가 곧 불국토 ’라는 신라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조성된 이 장륙존상은 신라 삼대 국 보의 하나로서 장대한 위용의 최대 걸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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