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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허무주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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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24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18-06-30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칼럼 지혜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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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봉래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김봉래(불교방송 선임기자)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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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20 13:09 조회 3,0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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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허무주의인가?

“모든 것이 인연의 소치임을 깨닫고 인연에 수순” 

“좋은 인연 적극 만들어가는 대자유의 길 걸어야” 


미국에서 가르치는 한국 출신 교수가 미국 대학생들이 불교에 대해 가지는 의 문들을 얼마 전 SNS에 올렸다. 왜 쇠붙이 불상에 절을 하느냐, 불교는 염세주의가 아닌가,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것이 뭐가 문 제인가,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 은 그렇지 않은데 그 뒤 여러 학파들의 이 론은 복잡하고 때로는 서로 상반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불교가 허무주의 아니냐 하는 학생들의 의문은 이렇다. 삶이 고해(苦海)이고 모든 것이 환상이며 또한 공(空)하다고 하는데 왜 삶과 세계를 꼭 이렇게 염세주의적으 로만 보아야 하는가? 반쯤 빈 술병을 “아, 벌써 술이 반밖에 안 남았네.”라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와, 술이 아직도 반병이나 남아 있구나!”라고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편이 좋지 않은가? 불교가 왜 삶을 고해에 비유하는지, 또 무아 내지 공의 가르침은 왜 시설됐는지 깊이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당연히 제 기될 수 있는 의문들이다. 

그리고 불교 내 부적으로도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사이에 는 논리에 대단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웬 만큼 공부한 불자들조차 불교가 혼돈스 럽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 게 사실이다. 과연 불교가 허무주의인지 아닌지 집중 적으로 따져 보자. 이고득락(離苦得樂)을 권유하는 가르침은 염세주의적이고 허무 주의적인 듯 보이기도 한다. 

불교는 이 세 계가 기본적으로 참고 살아야 할 사바세 계인 만큼 부지런히 도를 닦아 열반의 세 계에 들도록 가르치고 이 언덕을 떠나 저 언덕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치기 때문에 강물을 건너는 뗏목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 특유의 복합적 논리구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기(緣起)와 중도 (中道)는 이것과 저것이 칼로 자르듯 나눠 지지 않고 상호 의존되어 있음을 선언한 다. 그래서 열반도 꼭 어디로 나아가 성취 해야만 하는 절대의 경지라 하지만 그것 은 세속과 엄격히 분리된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자리가 그대로 열반의 세 계임이 선언된다. 10만억 국토를 지나서 아미타불의 불국토가 있다지만 깨달은 마음 속에 불국토가 건설되기도 하는 것 이다. 이런 복합적인 논리구조에 따라 불교가 세속적인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듯 보 이지만 그것은 출세간적 가치를 일깨우 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되며, 그렇다고 출 세간적인 가치에 매몰돼 세간적 가치를 배척하지도 않도록 한다. 꽉 쥐고만 있던 세간적 가치가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하 는 과정에서 놓아지면서 세상의 무상함 과 허무함을 경험할 수 있지만 그런 경험 또한 집착의 대상이 아니어서 허무주의 에는 빠지지 않는다. 

번뇌도 흔히 깨달음의 방해 요소로서 버려야만 할 대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선 불교에서는 ‘번뇌가 곧 보리(煩惱卽菩提)’ 라 해서 깨달음의 자양분이 된다. 선불교 는 번뇌를 회피해야만 할 대상이 아니라 행복의 밑거름이으로 적극 대면하도록 하며, 아예 번뇌 없이는 깨달음도 불가능 하다고 강조한다. 또 잊지 말 것은 불교가 개개인의 고유 한 상황과 능력에 맞춰 설해진 대기설법 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탐욕에 젖어 자기 도 망치고 세상에도 전혀 기여하지 못하 는 사람에게는 욕심을 내려놓으라 가르 친다. 

그러나 선의의 경쟁을 통해 자기발 전에 도움이 되는 욕심이나 세상을 위한 유용한 욕심이 필요한 경우에는 커다란 원력으로서 존중된다. 허무주의는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 도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어디 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사람을 떠돌거나 숨어버리게 만든다. 그러나 불교는 어디 있든지 모든 것이 인연의 소치임을 깨닫 고 인연에 수순하도록 한다. 우리는 인연 을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연기· 중도의 시각을 바탕으로 좋은 인연을 만 들어가는 능동적인 대자유의 길을 지향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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