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윤회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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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5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6-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지혜의 눈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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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6-20 16:12 조회 664회본문
윤회, 우빠니샤드 문헌서 유래…불교도 수용 무아임에도 ‘윤회하는 주체’ 두고 논쟁 진행
최근 불교계에서는 윤회(輪廻)에 대한 논쟁이 뜨겁습니다. 싼스끄리뜨어의 삼사라(saṃsāra)를 번역한 말로, 전생(轉生) 또는 유전(流轉)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윤회는 기원전 600년경 우빠니샤드(Upaniṣhad)의 문헌에서 비롯되어 대중에게 전파되었다고 하는데 같은 시기에 불교와 자이나교도 수용하였습니다. 업설(業說)과 결합되어 윤회는 힌두교, 자이나교와 불교에 공통적으로 있지만 그 내용은 서로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윤회의 주체로 영혼을 인정하는 힌두교와 자이나교와 불교는 무아(無我)를 주장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때문에 초기 불교에서부터 윤회와 무아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 논쟁은 윤회와 업, 무아설과 연기설, 그리고 열반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주요한 핵심교리와 연결되어 있어 매우 중요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윤회와 무아라는 두 개념은 이후 여래장 사상과 불성(佛性)과 공(空)과 연결되어 현재까지 많은 논쟁을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현대과학에서도 이런 윤회 내지는 순환을 말하고 있습니다. 빅뱅이후 원자는 중력에 의해 결합되어 우주를 형성해왔고 시간이 지나면 별들도 생명을 다해 다시 원자단위로 흩어진다고 합니다. 현대과학에서는 이러한 순환이 우주가 끝날 때까지 반복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력은 일종의 지향성(指向性)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불교의 업(業)과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향성의 흐름안에서 생명이 발현되고 진화(進化)하여 현재의 지구를 포함한 우주가 펼쳐져있는 것이죠. 진화도 연기(緣起)의 또다른 모습으로 이해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가장 큰 논쟁점은 윤회의 주체와 관련된 것입니다. 불교는 윤회의 주체로 고정된 자아내지 영혼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만물은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개별적인 업을 형성하고 한편으로 의지할 공간으로서 기세간(器世間)을 형성하는 공업(共業)을 짓게 됩니다. 기세간(器世間)이 곧 우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은 스스로의 행위에서 비롯한 업에 의해 끊임없이 순환하는데 업은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힌두교나 여타 종교의 결정론적 세계관과는 달리 불교에서는 해탈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죠.
어느 과학자가 과학을 종교를 비과학(非科學)의 영역으로 분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과학이란 non-science로 반과학(反科學, anti-science)과는 다릅니다. 신에 의해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입장의 종교에서도 고대에는 과학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과학이 발전하면서 자신들의 교리와 내용이 어긋나자 종교와 과학은 서로 충돌하는 단계에 와있는 것이죠. 위의 학자는 종교를 아예 과학과는 별개의 영역으로 설정하려는 의도인데 과학이나 종교는 세계 내지 우주를 설명하려는 공통의 목적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탐구한다는 측면에서 종교는 과학과 결코 별개의 영역일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의 ‘나’가 내생의 ‘나’로 그 본질이 유지된 채로 윤회전생(輪廻轉生)한다는 주장은 명백히 연기설에 배치됩니다. 이는 결정론의 또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연기설이 아닙니다. 불교의 윤회설은 무아(無我)와 짝을 이루고 있어서 향상(向上)과 향하(向下)의 변화가 가능하고 변화의 이상적인 형태인 열반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현대 과학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으로 우주의 탄생과 소멸을 말하며 무생물에서 생명이 발현되는 것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과학은 생명은 물질적 요소인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색(色)과 정신적 요소인 수상행식(受想行識)이 임시로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불교의 교리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무생물의 영역이 지수화풍이고 생물의 영역이 수상행식이라면 생명의 특징은 수상행식에 있습니다. 처음 오온설을 접하면서 왜 정신적 영역의 비중이 많은지 의문이 들었지만 생명 내지 인간을 설명하려면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소상히 밝혀놓은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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