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존중하는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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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1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2-01 신문면수 10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한주영 필자법명 - 필자소속 불교환경연대 필자호칭 사무총장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2-07 15:35 조회 1,033회본문
생명을 존중하는 생활
청정비구와 보살들은 좁은 길을 지날 때도 살아있는 풀을 밟지 않는데 더욱이 손으로 뽑겠느냐, 또 어찌 중생을 가엾게 여기는 보살이 중생들의 피와 고기를 취해서 음식으로 여겨 배를 채우겠느냐. 만일 비구들이 동쪽 나라에서 나는 명주실과 솜과 비단 등으로 짠 옷을 입지 않으며, 이 지방에서 나는 가죽 신발을 신지 않으며, 짐승의 털과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지 않으며, 짐승의 젖과 젖으로 만든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이러한 비구들은 세상을 진실하게 해탈하여 지난 세상의 빚을 갚고 삼계에서 떠돌지 않으리라.
『능엄경』
불교에서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절대적인 차별을 두지 않는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신이나 지옥중생까지도 모두 윤회하는 중생일 뿐이다. 다윈 이후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인간이 오랜 생명의 진화의 과정에서 태어났으며 유전적으로 다른 동물들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동물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런데 과학이 이런 사실을 밝혀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삶은 괴리가 크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 오히려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존중감이 컸다. 왜 이런 괴리가 생겼는가? 그 까닭은 17세기에 과학혁명이 일어나면서 자연에게서 생명을 빼앗고 기계적인 물질로 인식하는 기계론적인 세계관이 형성되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자연에게서 느끼는 신비감이 박탈되고 자연은 단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이용되는 도구적인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지금도 이런 과학문명에 영향을 덜 받은 원시부족들은 여전히 자연의 신비에 눈을 뜨고 자연과 교감하고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형성된 기계론적인 세계관과 도구적 자연관에 의해 대지를 함부로 파헤치고, 동물을 남획하고 서식지를 파괴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오랜 세월 대지에 묻혀 있던 화석연료를 채굴하고 이를 과도하게 사용함으로써 온실가스로 인한 기후위기를 맞이하였으며, 지구상에 여섯 번째 대멸종이라는 멸종위기를 맞이하였다.
올 겨울 미국에서는 지독한 한파로 일주일에 99명이 사망하는 등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기후위기의 원인은 미국이나 유럽 등 부유한 나라에서 일으켰는데 그 고통은 주로 가난한 나라 아프리카나 태평양 한가운데 섬나라 사람들이 겪고 있어서 기후 불평등에 대한 기후정의가 중요한 의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이제는 남북을 가리지 않고 전 대륙 모든 국가의 문제가 되었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온실가스의 주범인 화석연료 사용을 멈추고 태양이나 바람 같은 재생에너지로 바꾸는 에너지전환이다. 하지만 에너지전환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삶의 태도와 습관을 바꾸고 자연과 세계에 대한 의식을 전환해야 한다. 의식의 전환을 위해 종교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불교의 기여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에서 구원의 대상이 인간에 국한되지만 불교에서 구원의 대상은 인간을 뛰어넘어 모든 존재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불보살이 구원하고자 하는 중생이란 인간만이 아니라 뭇생명을 말하며 생명이라 할 때도 그 범위가 태난습화 4생과 욕계, 색계, 무색계 3계의 중생을 말한다. 또한 중생에는 유정과 무정이 있는데 사람이나 동물처럼 감정이 있는 중생만이 아니라 감정이 없는 풀, 돌, 물 등의 모든 존재가 다 중생이다. 최근에는 풀이나 나무도 감정을 느끼고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7세기 과학혁명과 함께 기계적 세계관이 지배했던 산업사회의 결과물로 나타난 각종 환경오염과 기후위기, 생물대멸종 위기를 극복하고 파국으로부터 뭇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의 세계관을 깊이 받아들이고 생활 속에서 실천할 때 가능하다, 부처님은 재가신자를 포함하여 모든 제자들에게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라는 것을 첫 번째 계율로 삼도록 하셨다. 그 이유는 자비심은 기르기 위해서인데 그 까닭은 우리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고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러므로 내가 선한 의지를 내고 선한 말과 선한 행동을 하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결국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우리 모두가 행복하고 안전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풀 한 포기 함부로 뽑지 않고 밟지 않는데 하물며 우리와 같이 감정을 느끼는 동물을 가축이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어떻게 부처님의 제자라 할 수 있을까? 나의 편리함과 안락함이 누군가의 희생에 의한 것은 아닌지 잘 살펴볼 일이다. 내가 먹은 음식, 내가 입는 옷, 내가 신은 신발과 내가 잠을 자고 이동을 하는 모든 순간에 뭇생명의 은혜를 생각하며 그들의 고통을 강요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깨어있는 선택이 필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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