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스님의 선밀쌍수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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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1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2-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밀교법장담론페이지 정보
필자명 정성준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교수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2-07 15:28 조회 1,046회본문
조선시대 선승들이 선밀겸수를 통해 반야와 방편의 쌍전을 도모한 사실은 선승들의 여러 행적과 문헌에서 발견되고 있다. 밀교에 관해 독자적인 종학을 보존할 수 없지만 조선말 무안 총지사(725-1810)가 마지막까지 버팀으로써 밀교도량의 완연한 모습을 적지 않게 보존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한국불교는 일제강점기에도 도량과 의식, 재를 여전히 설행하였고 선승들의 희생은 오늘날 한국불교의 면목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지난 기고에서 경허는 대중들에게 육자진언과 준제진언을 특히 전한 사실로 끝을 맺었다. 경허는 평생을 걸쳐 많은 재와 도량을 주도하고 증명법사가 되었기 때문에 진언과 의궤의 소재를 많이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선사들이 종학으로서 밀교를 어느 정도 의식했는지는 미완의 과제인 조선시대 의례집 연구를 통해 밝혀지게 될 것이다. 경허는 선가의 주요전적인 ????능가경????을 공부했다. ????능가경????은 선수행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장에 주의하고 능엄주를 함께 설한다. 선사로서 자신의 수행뿐만 아니라 세간 대중의 안위에 대한 방편을 아는 것도 납자의 주요 덕목이다. 때문에 ????경허집????에서 선수행의 교양으로 항마진언을 외우고, 대중을 위해 육자진언과 준제진언의 방편도 전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선가의 수행은 화두를 드는 것이지만 경허는 정토수행으로서 ????십육관경????의 관상수행을 다룬 장면도 나온다. ????경허집????에는, “????십육관경????에서는 관성성취법이 있어 마음을 한 곳에 묶어 두도록 하여 부처님의 형상을 관하는 것이 오랫동안 명료하면 삼매를 성취한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고, 이어 “보리란 무엇인가? 바로 중생의 일상행활 중에 신령하게 아는 성품입니다. 만약 이 신령하게 아는 성품을 개발하여 관상삼매를 성취하거나 일심불란을 성취한다면 어찌 왕생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런데 경허는 “만약 하나의 관이 또렷하여 오랫동안 명료하면 십육관도 모두 또렷하여 오랫동안 명료할 터이니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도 이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이와 같은 온전한 공부를 참선하는 조사의 문중에 적용하여 수행한다면 누군들 견성성불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경허는 관상이나 간화에 대해 성적등지(惺寂等持), 즉 깨어 있으되 적적함이 함께 지속되는 삼매를 강조했고, 방편의 차이보다 수행의 내용을 강조했다.
경허의 오도는 지난호에서 밝혔지만 선수행의 특징은 인도불교와 달리 화두를 들고, 견성의 경계에 대해서도 언어와 경계를 초월한 동아시아의 독자적 문학성을 빌린다. 경허는 성적등지끝의 오도에 대해, “이 현묘한 문을 참구하는 사람은 늘 반조하여 참구하는데 힘써서 마음을 씀이 성성하고 정밀하여 간단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참구함이 지극히 간절하여 더 이상 마음을 써서 참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갑자기 마음 길이 끊어져 본명원신(本命元辰)을 밟고 이 본지풍광이 본래 스스로 갖춰져 있어 원만하여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라고 하였다.
선사의 원융무애한 경지는 다른 제종에서 많은 참구대상이 된 사실은 고려말 진각국사어록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경허의 경우 승의와 세속의 불이경지를 몸소 실천하여 유명한대 밀교의 경우 이를 대락이라 말한다. 경허는 13세 동자인 경석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육처에 대해 “그 맑은 빛과 원만한 이치를 모르면 범부이고 전일하여 헤매지 않으면 범부이다”라고 하였으니 세속의 분별이 자성에서 진리와 다르지 않기에 이를 깨달으면 성인의 경계임을 밝힌 것이다. 사람들은 경허의 기행만 알지만 ????경허집????에는 “윤회를 벗어나려면 오로지 선정의 힘을 익혀야 한다”라고 하였고, “임종할 때 정신을 읽고 마는 것도 모두 선정의 힘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경허가 세상에 몸을 감춘 것은 갑진년(1904) 봄으로 안변 석왕사 개금불사때 법회 증명법사가 되어 설법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무려 10년 뒤 수월에 의해 스님의 행적이 비로소 알려졌다. 경허는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옷을 입고 갑산, 강계 등지를 오가며 서당에서 학동들을 가르치고 저잣거리에서 술잔을 들며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임자년(1912) 봄 갑산 웅이방 도하동에서 입적했다. 경허의 마지막은 울타리 아래 앉아 학동들이 호미로 풀 매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경허는 갑자기 누워 거동을 못하면서 ‘내가 몹시 피곤하다’라고 하여 사람들이 방으로 모셨고, 이틀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누웠다가 마지막 날 임종게를 남긴 후 붓을 놓고는 우협으로 누워 입적하였다. 때는 임자년 4월 25일이었다.
마음 달이 외로이 둥그니
그 빛이 만상을 삼키도다.
빛과 경계가 다 없어지면
다시 이 무슨 물건인가.
밀교는 원교로서 선을 포용하고 화엄을 포용해야 한다. 특히 한국불교의 불자들이 다양한 공부의 방편을 섭렵해 그 배경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불자의 포교는 화엄, 선, 정토, 밀교의 회통에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 경허가 어느날 상당법문한 내용에는, 「주장자를 들어서 한번 내리치고 이르기를, “이 말소리가 이것이다. 일러 보라.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또 한번 주장자를 내리치고 이르기를, “한번 웃음에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는데, 안면도의 봄물은 쪽빛처럼 푸르다”하고는 주장자를 던지고 ‘훔’이라 하시다」라고 하였다. ‘훔’은 육자진언의 결주이기도 하며, 심진언으로서 ‘열반심’을 가리킨다. 경허는 ‘훔’자 진언에 밀교와 선을 융합해 융통한 대각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선사로서 밀교의 재를 무수히 개설하였지만 의궤의 격을 뛰어넘고, 발보리심에 의해 중생구제의 자비를 품었지만 현실은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 쇠망한 비극을 몸소 겪었다. 진속불이와 선밀쌍수의 걸림 없던 경허선사의 행장이 혼란한 시기에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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