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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에 전력투구하는 것이 ‘용맹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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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1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2-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왕생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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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2-07 15:24 조회 1,05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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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에 전력투구하는 것이 ‘용맹정진’

“게으른 사람들은 너무 이르다 하여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늦다 하여 할 일을 하지 않으며, 너무 배부르다 하여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배고프다 하여 일을 하지 않으며, 너무 덥다 하여 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춥다 하여 할 일을 하지 않는다.” 『출요경』


우리 속담에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물방울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 단단한 돌덩이를 뚫듯이 작은 노력이라도 끈기있게 계속하면 큰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마 이 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그와 같이 노력하며 사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원인은 긴 시간을 인내할 만큼의 끈기가 부족하거나. 쉬고 싶고 미루고 싶은 유혹에 지거나. 지레 겁먹고 그 가능성마저 포기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빨리, 쉽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호락호락한 일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일들도 알고 보면 수많은 인내와 노력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 다니고, 말하고, 글씨를 쓰고 하는 너무나 일상적인 일들도 사실은 한순간에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 없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꾸준히 준비하고 노력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들입니다. 만약에 그러한 일들이 어렵고 힘들다고 “나중에 하지 뭐”하면서 계속 뒤로 미루었거나 “난 못하겠어!”하면서 포기해 버렸다면 아마 아직도 유아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으르지 않기 때문에 비록 바윗돌과 같은 난관에 부딪친다 해도 그것을 일상적인 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게으르다면 사소한 일들도 큰 어려움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게으름이란 모든 허물의 바탕이다. 집에 있는 이가 게으르면 의식이 부족하고, 사업이 쇠퇴할 것이요, 출가한 이가 게으르면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집에 있는 이가 정진하면 의식이 풍부해지고, 사업이 번창할 것이요, 출가한 이가 정진하면, 법을 모두 성취하여 마침내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나니, 모두가 정진에 의해 이루어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는 흔히 은둔 종교, 허무의 종교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불교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희망을 만드는 종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를 ‘정진론자’라고 하실 만큼 정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정진불교’라고 부릅니다.


불교는 신의 구원이나 우연을 근본적으로 배격하고, 인간 스스로의 끊임없는 수행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신의 구원을 바라며 끈임없이 기도하는 것도, 우연히 구원이 있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것도 일명 정진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노력없이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는 순간까지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모든 것은 변해가나니, 게으름없이 힘써 정진하라”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중생의 괴로움이 비록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생기지만 진리에 대한 무지마저도 초극할 수 있는 것이 정진의 힘이기에, 중생의 괴로움을 초래하는 더 큰 원인은 게으름이기에,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정진하라”는 가르침을 남기신 것입니다.


지혜가 부족한 자는 진리를 알지 못하고, 지혜의 눈이 청정한 자는 진리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부족하다고 해서 영원한 진리를 보지 못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는 우둔하기로 소문난 판타카라는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부처님이 기 원정사를 나서려는데 그가 큰 소리로 울고 있어서 부처님께서 다가가 물었습니다.


“판타카야, 너는 왜 울고 있니?”


“부처님, 저는 사형이 가르쳐 주는 게송을 아무리 해도 외울 수가 없습니다. 형은 저더러 희망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부처님,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걱정하지 마라”


부처님께서는 판타카의 손을 붙잡고 고요한 방으로 가서 빗자루를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부터 ‘쓸고 닦아라’, 이 구절만 외우고 생각하여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판타카는 ‘쓸고’을 외우면 ‘닦아라’를 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여 며칠 만에 ‘쓸고 닦아라’를 외우게 되었고, 날이 가고 달이 지나 판타카는 드디어 이 말의 깊은 의미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쓸고 닦아라는 말은 티끌을 없앤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이것으로 나를 가르치시는가. 지금 내 몸에도 티끌과 때가 있다. 나를 스스로 비유해 보자. 무엇을 없애는 것이며, 무엇이 때인가. 그래 번뇌는 때요, 지혜는 없애는 것이다. 나는 지금 지혜의 비로써 이 결박을 쓸어버리자”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마음이 해탈되어 해탈의 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나아가 예배하고 기쁜 얼굴로 사뢰었습니다.


“부처님, 이제는 지혜가 생겼나이다. 이제 깨달았나이다” 

“무엇을 깨달았는가?”

“착하다 비구야, 네 말과 같다. 지혜로 번뇌의 티끌을 없애는 것이다.”


이 구절은 정신지체 장애를 갖고 있는 어리석은 판타카가 깨달음을 얻고 아라한이 된 내용입니다. 단어 두 개조차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그가 끊임없는 정진 끝에 아라한인 성인의 대열에 들어간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리석은 사람도 있고, 부유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혜롭고 부자인 사람도 게으르면 어리석고 가난하게 될 것이고, 어리석고 가난한 사람이라도 노력으로 지혜롭고 부유함을 일구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노력만 한다고 해서 성공하거나 지혜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노력은 자신을 더 큰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맙니다. 또한 무식하게 노력하면 몸만 고단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수도 있습니다. 온갖 비행과 잡기에 열중하는 사람,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맹목적으로 매달리기만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정진을 해야 합니다. 올바른 정진이란 바른 가치관에 입각한 목표가 설정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수단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마치 돌아갈 항구도 모른 채 노를 젓기만 하거나 입으로만 노젓는 방법을 외는 것과 같이,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결국 표류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정진은 겉으로 드러나는 노력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올바른 정진이란 사악 하고 건전하지 못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고, 이미 일어났다면 그러한 마음을 제거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하고 건전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노력하고, 이미 존재하는 선하고 착한 마음은 완전하게 개발하는데 열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게으름과 같은 잡된 생각이 더이상 발붙일 수 없도록 철저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정진이 바로 용맹정진입니다.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바로. 이 순간에 자신의 삶에 전력투구하는 것이 용맹정진입니다. 촛불처럼, 폭포수처럼 부단히 깨달음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용맹정진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밤새는 것을 용맹정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옛 선사들은 ‘기한에 발도심한다’라고 했습니다. 줍고 배고플 때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시간이 되면, 따뜻하면, 넉넉하고 여유로우면 수행도 하고 봉사도 해야지”하는 마음을 먹기가 쉽습니다. 게으름의 어감은 상당히 굼뜬 것 같지만 우리 마음의 빈틈을 알아내는 데는 빠르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조그만 악이라 하여 가벼이 여기지 말고 조그만 선이라 하여 무시하지 않으며 꾸준히 악을 끊고 선을 기르는데 정진하는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정진을 생활화하는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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