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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 중심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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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4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5-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지혜의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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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태원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칼럼니스트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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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5-03 13:45 조회 85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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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 중심의 종교

깨달음은 본래진면목을 알아차리는 것

다름 인정하면 차별사라지고 평등실현


불국토(佛國土)는 부처가 사는 땅인데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어 이루는 땅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깨달아서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깨닫기 이전의 ‘나의 모습’은 사라지는 것일까요? 부처가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다름이 사라지고 부처라는 ‘일미(一味)’로 똑같아진다는 것일까요?


불교는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는 것을 추구하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저의 짧은 생각입니다.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부처’가 된다는 것이고 그 지점에 이르면 모두 똑같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깨닫고 난 후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 본래 진면목(眞面目)임을 아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 다름을 이해하는 것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다르기 때문에 그 차이에 서열을 매기고 우열을 구분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문명의 길이고 그 현재적 지점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시장에서 거래하는 체제가 자본주의로 그 안에는 인간도 상품으로 치환합니다. 이렇게 서열을 매기는 것은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차이를 통해서 서열을 매기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름을 통해서 서로가 의지해서 있음을 아는 것이 까달음의 내용의 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차이가 있음으로 나는 의미가 있고 내가 있는 것이 상대가 있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깨달음의 내용의 한 측면은 아닐까요. 


조주세발(趙州洗鉢)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여쭈었다.

“저는 총림에 갓 들어왔습니다.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아침 공양은 하였는가?”

“예 하였습니다.”

“그러면 발우는 씻었는가?”

이에 그 승려는 깨닫는 것이 았었다.


평범한 일상 대화속에 담겨있는 의미를 순간에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행이 쌓여있어야 합니다. 때가 무르익어서 깨달음이 성취되었다고 해야합니다. 이 선문답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한가지는 평범한 일상속에 진리가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일상은 현재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등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그 속에 놓여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상을 실행하는 모습은 다릅니다. 일상이 실현되는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거기에는 우열이나 귀천이 없이 평등한 과정입니다.

 

이러한 선문답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할 때 저는 과학의 내용을 빌려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존재가 있고 그다음에 존재사이의 관계가 설정된다고 시간의 선후로 존재와 관계를 이해합니다. 그러나 빅뱅이론의 하나의 점에서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존재로 분화되면서 동시에 관계가 설정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존재와 관계는 선후가 아니라 동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관계는 연기(緣起)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저 선문답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으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평범한 일상속에서 진리가 담겨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평범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관세음보살을 읊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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