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삼모사가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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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2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3-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남혜 필자소속 - 필자호칭 정사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3-12 13:18 조회 1,064회본문
조삼모사가 주는 교훈
학창시절 <장자(莊子)>라는 책을 보게 되었는데 그 책의 ‘물고기와 도(道)’라는 부분이 좋아 한동안 그 구절을 외우고 다녔던 적이 있다.
“물고기는 물에서 나고 사람은 도(道)에서 난다. 물에서 난 물고기는 연못의 깊은 그늘로 찾아 들어가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채워진다. 도에서 난 사람은 행위 없음의 깊은 그늘로 침잠해 다툼과 근심을 잊는다면 그는 아무 부족함이 없고 그 삶은 평화롭다.”
행위 없음의 철학, 물속 깊이 가라앉은 물고기처럼 나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행위 없이 고요하게 지내고 싶었다. 내가 인위적으로 관여하지 않아도 자연계는 두루 돌보아진다. 행위가 아닌 존재에 관심을 가져라는 장자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학창시절 장자가 좋았다. 장자처럼 한량으로 살고 싶었다. 놀고먹는 한량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는 것을 내려놓고 자연에 동화되어 연약한 존재로 살고 싶었다. 살아 숨 쉬는 것은 연약하다. 하지만 더욱 연약해질수록 내면의 깊이는 깊어진다. 바위는 아주 단단하고 강해 보이는 반면, 물은 너무 연약해 보인다. 하지만 물방울이 바위에 계속 떨어지면 결국 바위는 닳아서 모래가 된다. 부드러움은 연약해 보이지만 부드러움은 단단함을 녹여 버린다.
장자에서 유명한 이야기 중의 하나가 ‘조삼모사(朝三暮四)’이다.
“마음을 괴롭혀서 하나로 만들려고만 했지, 본디 동일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일러 ‘조삼(朝三)’이라고 한다. 조삼이란 무엇인가? 저공이 도토리를 주려고 하면서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를 주겠다고 하였더니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내었다.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하였더니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름과 실상에 다름이 없는데도 기쁨과 성냄의 작용은 달랐으니, 이는 또한 주관적인 판단으로 인해서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시비를 조화시켜 자연에 맡겨 가지런히 만든다. 이를 옳고 그름이 함께한다고 하는 것이다.”
조삼모사는 어리석은 사람이나, 잔꾀로 남을 속이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열자(列子)는 “사물이 지혜로써 서로를 속이는 것이 다 이와 같다. 성인은 지혜로써 어리석은 군중들을 속이는데, 역시 저공이 지혜로 원숭이들을 속이는 것과 같다. 이름과 실상을 훼손하지 않고 그들을 기쁘게도 하고 노하게도 한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조삼모사의 내용을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될까? 저공은 왜 도토리 세 개를 주려했고, 원숭이는 왜 도토리 네 개를 받고 싶어 했을까? 저공의 입장에서는 줄 수 있는 도토리가 한정되어 있어 하나라도 덜 주어 미래를 위해 하나라도 더 저장하고 싶었을 것이고, 원숭이의 입장에서는 한정된 도토리의 양으로 볼 때 당장 저녁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침에 하나라도 더 먹어 두는 것이 생존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공과 원숭이의 겉으로 보이는 행동을 비난하고 비판하기 전에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고 들여다볼 수 있는 자비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저공과 원숭이는 각자의 위치에서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하고 있는 것이며, 저공과 원숭이는 현재의 처한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했을지 모를 일이다.
대학 때의 일이다. 하루는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나에게 “선배는 꿈이 뭐에요?”라고 물었다. 그래서 “내 꿈은 한량이다”라고 말했더니 후배는 자신을 싫어해서 그렇게 말하는지 알고 인상이 안 좋아져서 말없이 가버렸다. 그래서 다음에 다시 만나 내 꿈이 왜 한량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오해를 푼 적이 있다.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있지 않다. 실상을 잘 들여다보는 것, 이것이 불교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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