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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비, 실천 이념이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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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1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19-12-01 신문면수 7면 카테고리 기획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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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5-21 04:11 조회 4,99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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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비, 실천 이념이 되어야”
인선 통리원장, 제22차 한중일불교우호교류회의 학술강연회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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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주해 대회 (이하 주해 대회)가 지난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중국 광둥성 주해시 보타사 천왕전광장에서 세계평화기원법회 봉행을 시작으로 주해 대회 개막식에 이어 주요행사로 쉐라톤 호텔에서는 ‘불교와 인류운명공동체의 구축’이라는 주제로 학술강연회가 개최됐다. 한국측에서는 전종단을 대표하여, 총지종 통리원장 인선 정사가 ‘불교의 자비를 통한 인류운명공동체 구축’이란 주제로 발표를 했다. “자비는 인류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으며, 보다 건강한 인류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실천 이념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한중일 삼국의 불제자들이 진중하게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응시하여, 세계 평화와 인권의 증진에 기여하고자 마련된 이번 주해 대회를 되새기고, 총지종에서 표방하는 자비가 어떤 의미로 인류공동체에 기여할 것인가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발표 내용 전문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불교의 자비를 통한 인류운명공동체 구축

불교는 자비의 종교이다. 이러한 핵심가치는 모든 존재들을 향해 있으며, 인류사에 있어서는 시대와 지역을 관통하는 보편적 실천 이념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무자비와 폭력, 전쟁의 역사로 얼룩져 있다. 이는 개인고} 개인, 집단 간의 갈등 그리고 환경과의 부조화를 일으키는 인간의 그릇된 욕망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자비심과 그릇된 욕망이라는 양면성을 가진 인간은 무엇일까? 불교에서는 인간을 불변하거나 고정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심리 •물질적 과정으로 설명을 한다. 그것은 과거의 업과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생기고 또 그에 의해 지탱되는 상호 의존적 관계의 흐름이다.

사람은 다섯 가지 무더기 또는 오온 (paficakkhandha)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물질적인 것이고 나머지 넷은 심리적인 것이다. 물질 (rupa), 느낌 (vedana), 인식 (sanna), 형성력(saiikMra), 식(vinnana)의 다섯이 그것이다.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인간은 정신과 물질(nama-rupa)의 복합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이란 불변하거나 고정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심리•물질적 과정이다. 즉, 불교는 인간을 과거의 업과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생기고 또 그에 의해 지탱되는 상호 의존적 관계의 흐름인 연기 (patic asamuppada) 로 설명한다. 이러한 인간은 인과로 조건 지어지는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공동체의 일부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모든 유정물들을 일컬으며 때론 자연계 전체를 포괄한다.

공동체 속에서 인간은 신이 창조한 특별한 피조물도 아니며, 동물 등에 대한 ‘지배권’ 혹은 자연에 대한 ‘관리권’을 부여 받은 존재 등도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지나친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생물다양성의 감소, 지구 온난화, 오존층의 파괴, 해양오염 등으로 인류운명 자체를 위협받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집단간, 국가간의 갈등으로 인해 평화는 항상 요원하다.

불교에서 인간의 운명은 숙명도 우연도 아닌 ‘자업자득’의 원리를 따른다. 자신의 업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말이다. 업이란 범어 카르마(karma) 내지 카르만(karman)의 번역어로 몸과 입, 의지로 짓는 언행을 뜻한다.

업의 힘은 각자의 삶을 어떤 영역 안에 머물게 하고, 어떤 궤도를 돌며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하게 만든다. ‘정체성’이라고도 번역되는 ‘동일성 (아이덴티티, identity)’은 이런 업의 힘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업자득은 언행이 야기한 결과가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그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네가 어떤 존재인가는 네가 전생에 했던 일이 만든 것이고, 다음 생에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는 지금 네가 하는 일이 만들 것이다.”라는 말은 이런 생각을 잘 요약해서 설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운명의 현재는 과거의 소산이며, 미래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로 인해 결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보다 나은 공동체를 위해 자비의 길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자비의 길은 먼저 얼핏 양립할 수 없는 욕망의 문제를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욕계는 욕망이 구조화된 세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는 기본적으로 욕망과 밀접한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욕망에 대해서 초기불교에서의 대표적인 표현으로 까마(kama), 라가(raga), 딴하(tapha), 찬다(chanda) 등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까마가 감각적 욕망이고 라가가 집착적 탐욕이라 할 때, 이런 감각적 느낌(vedana)과 집착 (upadana) 사이에 있는 것이 딴하(taijha)이다. 까마, 라가, 딴하가 괴로움의 뿌리로서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찬다는 매우 중립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찬다(chanda)는 행위를 하기 위한 의지나 욕구, 또는 대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심리 현상 등을 가리키기 때문에 ‘의욕’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흔히 의욕은 그 결과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단지 ‘하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의욕으로서의 찬다에는 부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면이 모두 포함된다.

타자(유정계와 자연계를 포함한)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욕망은 때로는 이기적으로 때로는 이타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욕망의 지향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다.

특히 ‘행위를 하기 위한 으]지’나 ‘행위를 하기 위한 욕구’ 등을 의미하는 찬다(chanda)는 가치중립적으로 무엇과 연 결되느냐에 따라 선 (kusala)하게 진행되기도 하고 불선 (akusala)하게 진행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의욕은 도덕적으로 다양한 변화의 가능성을 함의하고 있다.

자비는 불교의 실천이라는 면에 있어서 그 중심 덕목이다. 찬다(chanda)가 자비와 연결되었을 때, 인류운명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것이다.

자비는 자(maitri, metta; 우정, 친애의 마음)와 비 (karuna, karuna;불쌍 히 여기는 마음)가 결합된 말로써, 『인왕경소』에 따르면 자비란 고통을 없애 주고, 즐거움을 주는 발고여락의 태도라 할수있다.

또한 자비를 의미하는 팔리어 karu, mett, anukamp 세 어휘들의 의미를 종합하면, ’자신과 타인에게 이롭지 않은 것과 괴로움을 제거하려는 의도와 행동 그리고 자신과 타인에게 이로운 것과 행복을 가져오려는 의도와 행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개념 규정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자비라는 말은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자비행뿐만 아니라, 행동을 통해 드러나지는 않지만 마음에 간직되는 '의도’로서의 자비까지를 의미하여, 행동에 의한 자비와 감정의 공유에 의한 자비의 두 측면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비는 욕망과 지혜와의 관계를 통해 그 의미가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그릇된 욕망은 업 지향적인 비본래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고, 지혜는 열반 지향적으로 불교가 추구하는 본래적인 삶과 관련되어 있다.

잘못된 욕망으로 인해 현상세계의 차별성을 따라 대상에 집착하고 애착하여 업을 짓고 윤회하면서 점점 더 허망분별의 차별성을 증폭시킬 뿐이라면, 깨달음인 지혜는 그러한 망분별과 집착을 버려 윤회의 현상세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지나친 욕망은 허망한 비본래적인 현상세계에 점점 더 침몰하는 것이라면, 지혜는 그 허망성을 자각하여 본래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잘못된 욕망이 윤회를 낳는다면, 지혜는 윤회고리로부터의 탈출, 해탈을 낳는다.

자비는 그릇된 욕망과 지혜, 비본래적인 삶과 본래적인 삶, 윤회와 해탈, 그 양 극단을 다시 화해시키는 마음이다. 가의 현상세계이지만, 그 안에서 고통 받는 유정의 마음은 가가 아니기에, 그 마음의 고통은 진실이기에, 그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 보살의 자비심이다. 보살은 욕망의 현상세계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상세계에서 지혜가 발현되는 열반의 세계, 정토가 실현되기를 희망한다.

이렇듯 자비는 비본래적인 현상세계에서 고통 받는 모든 유정들을 향해 있으며, 그것은 인류공동체가 사는 세상을 정토로 만들기 위한 실천 이념이다.

지금의 인류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개인과 국가들은 복잡한 상호 의존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인류 사회는 언어와 문화, 국적과 인종에 상관 없이, 지구촌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모든 이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보편적 선(kusala)인 자비는 인류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으며, 보다 건강한 인류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실천 이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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