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신문 아카이브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

페이지 정보

호수 242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01-01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역삼한담

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정수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시인 김정수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5-21 06:17 조회 5,045회

본문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

서울의 한 미혼모 시설에서 시창작 강의를 했다. 12주 강의하는 동안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옷을 바꿔 입었다. 1주차에는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기를 안고 들어온 젊은 엄마도 있었다. 아기를 봐주기로 한 자원봉사자가 늦는 바람에 일단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던 것. 11주차에는 6개월 된 아기를 안고 들어온 젊은 엄마가 힘들어해 강의 후반 20분쯤 아이를 안고 시를 읽었다.
마지막 강의는 시와 더불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했다. 강의가 끝난 다음에도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시창작의 이해’ 프레젠테이션 강의 후 백지에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장 소중한 것 열 가지’를 써보라고 했다. 가족이라 뭉뚱그려 쓰지 말고 아버지·어머니·아이 등 구체적으로 쓰라 했다.
조금 느긋하게, 열 가지를 다 쓸 때 까지 기다렸다가 말했다. “지금부터 그중에서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세 가지를 지워보세요.” 열 가지 중 세 가지를 지워도 일곱 가지가 남아선지 다들 어렵지 않게 지웠다. 다시 말했다. “그중에서 다시 세 가지를 지워보세요.” 맨 앞의 젊은 엄마는 망설임 없이 지워나갔다. 뒤에 앉은 젊은 엄마들은 조금 망설이더니 천천히 세 가지를 지웠다. “이제 네 가지가 남았습니다. 그중에서 두 가지를 더 지워보세요. ”여유가 있던 얼굴에 순간 긴장감이 흘렀다. 망설이는 빛이 역력했다. 소중한것 열 가지 중에 벌써 여덟 가지를 포기했다. 그들은 남은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내 얼굴을 바라볼 때까지 뜸을 들이다가 “그러면 이제 두 가지 중에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한 가지만 남겨보세요” 했다. 이미 짐작하고 있어선지 망설임 없이 결정했다. 가장 빨리 결정한 맨 앞의 젊은 엄마에게 물었다. “무엇을 남겼습니까?”, “건강이요.”, “그러면 그 전에 무엇을 지웠나요?”, “사랑과 행복이요.”, “맞습니다. 건강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이지요.” 그가 적은 것에 사람은 들어 있지 않았다.
뒤에 앉은 젊은 엄마들은 예상대로 ‘아기’를 남겼다. 지금 이 순간 아기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랴. 난 천천히 아이들을 키운 경험을 들려주었다. 가난을 물려주기 싫어 결혼도 안 하려했고, 결혼해서는 아이를 안 낳으려 했는데 둘씩이나 낳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 때도 많았지만 아이들로 인해 기쁠 때가 더 많았다는 것을. “아이가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지금의 그 마음 잊지 말고 살라”는 뻔한 말로 마무리했다.
이제 남은 한 사람, 쓰면서도 지우면서도 많이 망설이던 젊은 엄마 차례였다. “무엇을 남겼나요?”, “남동생요.” 전혀 뜻밖의 대답에 난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물었다. “누구라고요?”, “한살 어린 남동생요.”, “아이가 아니고요? 그러면 아이는 언제….”, “마음은 아이를 남기고 싶었지만, 현재 나를 가장 많이 이해해주는 건 남동생이라서요. 그래서….”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아도 이해가 됐다. 젊은 엄마는 지금 힘든 시기를 견디고 있다. 누군가에게 위로 받고 의지하고 싶을 때 남동생이 힘이 되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엄마 모두에게 아버지나 어머니는 순위는 커녕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자의든 타의든 자식이 임신을 했다면, 부모는 마땅히 지켜줘야 한다. 그래야 부모인 것이다. 늘 내 편이 되어주는, 그런 사람.
그날 밤, 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소중한 것 열 가지를 말해보시오.’ 아내, 자식, 건강, 사랑, 행복, 돈, 시, 책, 여행, 친구. 젊은 엄마들에게 했던 것처럼 그중에서 세 가지, 다시 세 가지, 마저 두 가지를 지웠다. 회가 거듭될수록 심적 압박감이 대단했다. 친구를 치울 때는 관계를 단절하는 듯했고, 사랑을 지울 때는 사랑이 사라지는 듯했다.
‘아, 난 젊은 엄마들에게 너무 잔인한 선택을 강요했구나!’ 뒤늦게 후회하고 많이 반성했다. 내가 남긴 한 가지? 그저 웃지요.

시인 김정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