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신문 아카이브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삼회향·산대·땅설법·지화

페이지 정보

호수 299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10-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밀교법장담론

페이지 정보

필자명 정성준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박사 필자정보 -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10-15 11:38 조회 70회

본문

삼회향·산대·땅설법·지화

티벳불교와 몽골불교는 참(‘Cham)이라는 가면극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세계의 가면극은 어느 나라나 존재하지만 인도는 다양한 종교와 더불어 가장 많은 가면과 가면극의 전통이 있다. 인도에서 불교를 소재로 한 가면극을 쉽게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석가모니 붓다 재세 시에  범패의 흔적이 이미 보이기 때문이다. 티벳에 불교가 전해지면서 대중들을 위한 가면극도 함께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티벳불교와 몽골불교는 동일한 가면과 춤사위를 보이지만 지역과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가면의 형태도 변화가 있다. 한국에서 시연된 최초 참 가면극의 공연이 생각난다. 1990년대 중반 라다크의 한 사원의 스님들을 초청한 것이었는데 올림픽 공원경기장에서 미래 아내가 될 사람과 함께 필자는 재미있게 관람한 기억이 난다. 당시 한국은 참에 대한 문화나 지식이 전무 했기 때문에 흥행은 신통치 않았다.  

티벳.몽골·한국의 가면극의 공통점은 그 연원이 규모가 큰 도량이나 법회를 행할 때 산대를 지화를 갖추어 시설하고 모든 의식을 마친 후 회향의 과정에서 대중을 위한 본격적인 가면극이 열렸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전해진 산악백희(散樂百戱)라는 말을 짐작해 보건데 정비된 불교의식과 달리 대중들의 시각에서 주로 재밋거리를 등장시켜 의식의 긴장을 도모하고 신분이 다른 여러 계층의 대중이 모여 신분의 긴장을 해소했던 성격을 알 수 있다. 한국불교의 경우 최초 가면극의 설행은 알 수 없지만 범패의 흔적은 <삼국유사>에 일찍이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무악, 백제의 기악이 있었으며, 신라의 처용무를 비롯해 고려의 산대잡극과 가면희, 조선시대 다양한 산대놀이가 형성되었다. 본래 산대놀이는 언제부턴가 의례 가면극으로 통용되었고, 가면극에 등장하는 주제는 파계승의 풍자, 양반에 대한 모욕, 부부의 갈등, 서민의 가난이어서 불교의식이 사회적 회향으로 발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교도량이나 의식의 마지막 단계에 설행되는 회향은 1960년대까지는 존재하였다가 1970년대 이후 사라졌으며, 2018년 강원도 삼척 안정사에서 땅설법이라는 이름으로 재현한 소식을 들었다. 땅설법에 대한 학술연구도 최근 보게 된 것이지만 김형근의 연구에 의하면 원래 명칭은 1963년 최정여의 증언에 의해 ‘삼회향놀이’였다고 하였다. 삼회향에 대한 다른 용어는 ‘강창(講唱)’, 혹은 ‘속강(俗講)’인데, 조선시대 발간된 <원각경언해> 제9집에는, “규봉종밀은, [원각의] 상(相)을 나누면 사량하고 헤아리며, 계교하고, 마음을 일으켜 행상을 지으니, 탑을 만들며, 절을 만들며, 부처를 공양하며, 중을 공양하며, 주를 지니며, 경을 지니며, 승강(僧講)하고 속강(俗講)한다”라고 하였는데 속강은 왕이나 귀족을 대상으로 한 승려의 법문이 아닌 대중법문의 성격임을 짐작케 한다. 

회향의 변화에 대해 그 정의를 살펴보면 <유가사지론에서>, “회향은 보시를 비롯한 일체행을 구족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를 얻기를 서원하는 것이다”〔『瑜伽師地論』75、T30・712a〕라고 하였다. 회향에 대해 정영사 혜원(浄影寺慧遠, 523-592)은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자신의 선근공덕을 자신의 보리를 깨달음에 돌리는 것은 보리회향이고, 중생들에게 돌리는 것은 중생회향이며, 진여법계에 돌리는 것을 실제회향이라 하였다. 일본 진종에서 중요시하는 회향의 해석은  최소 자신과 이웃과 사회 대중을 의식하는 것은 분명하다. 삼회향과 관련한 주변 연구는 산대(山臺)와 지화(紙花)와 관련한 연구이다. 산대는 도량에서 본존의 배경을 장엄한 장식이며 이를 의례 지화로 장식하기 마련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밀교도량의 시설을 아는 진언승을 범패승이라 일컬었듯이 산대를 설행하는 승려를 짚어 ‘산대하는 무리’라는 말도 볼 수 있는데 아는 자라면 아사리, 아니면 밀교승이라 일컬었을 것이다. 

또한 채붕(彩棚)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산대극을 연희(演戲)할 때 진설했던 무대를 가리킨다고 하였는데 당시 산대의 가설은 나무로 다락을 만들고 그 위에 오색 비단 장막을 늘어뜨린 가설무대였다고 한다. <허백당시집> 권7에는, “깊은 궁전 봄볕 아래 채붕을 높이 띄우고 붉은 옷 그림이 종횡으로 벌여 있네. 공 놀림은 참으로 의료의 기교 같거니와 줄 타는 건 또한 비연의 가벼운 몸매 같구려”라고 하였으니 산대극은 줄타기와 공의 기교를 보이는 서커스가 함께 열리는 대중들의 구경거리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12년 병진(1736) 3월 17일(신해)의 기록에는 파춘수 이목의 솟장이 올라왔는데 내용에는 당시 상놈들이 각각 산대를 설치하고 산대놀이를 하는데, 그중 김상건이라는 자가 욕 찌거리로 모욕하여 잡아 오려 했으니 힘이 세어 관원들이 오히려 맞았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또한 정조 23년 기미(1799) 3월 19일(정축)의 기록에는, “지금 놀고먹는 자로는 중이 가장 많습니다. 스스로 머리 안 깎은 중이라고 칭하면서 목탁 치고 돌아다니며 염불을 하고는 남의 재물을 취하고, 가짜 배우도 산대하는 무리라고 하면서 장을 따라다니며 놀음판을 벌여 남의 돈을 탐하니, 하늘이 이것을 미워하여 가뭄이 든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사람사는 시대상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이외 산대를 장식하던 지화에 대해 민속과 관련한 연구가 전개되지만 그 이면의 세계관에 밀교와 중첩된 것이 많이 있어 향후 협동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