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신 구현은 내가 스스로 진리의 몸 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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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8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9-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 읽는 종조법설집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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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9-12 14:22 조회 203회본문
제1장 교상(敎相)과 사상(事相) 편(篇)
제2절 현밀이교(顯密二敎)의 차이점
1. 현밀이교(顯密二敎)의 비교
라) 현교는 삼밀이 없고 밀교는 삼밀이 있다.
삼밀은 행자(行者)와 법불(法佛)이 직접 상응(相應)하는 것이다. 구밀, 심밀, 의밀이 그것이다. 뜻으로 본존(本尊)을 관하고 몸으로 밀인(密印)을 결(結)하고 입으로 진언을 염송하는 것이 곧 그것이다. 이 본존삼밀을 행자가 동일하게 행하는 고로 소위 비밀이 상응하는 까닭으로 이르되 유가삼밀이라 한다. 이렇게 하여 숙달한즉 거수동족(擧手動足)이 신밀 아님이 없으며 개구발성(開口發聲)이 구밀 아님이 없으므로 이를 일러 즉신성불이라고 하는 차제이다. 이렇게 되면 삼세의 모든 일에 통달하게 되고 다음에 육신통(六神通)도 얻어지며 호풍환우(呼風喚雨)도 하는 신통변화(神通變化)가 자유자재하여 지는 것이다. 뭣으로 녹록(碌碌)한 세간사에 얽매여 지낼 것이냐 말입니다.
삼밀에는 삼, 사백종이 있으니 한손가락을 굽히고 한손가락을 펴어 능히 좌우(左右)로도 하여 능히 천지의 기상(氣象)을 변화시키고 인간만사가 자유자재 하니 전혀 삼밀 가운데 있는 것이다.
바) 교주(敎主)의 차이점과 본존(本尊)
법신불의 체상용(體相用).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식(識) 육대를 체(體)로 하고 대만, 삼매야만, 법만, 갈마만인 사만(四曼)을 상으로 하고 신어의(身語意) 삼밀을 용(用)으로 한다. 그래서 이 우주 전체의 대소물체(기체氣體, 고체固體, 액체液體)가 이에 넘지 않는다. 그런고로 법신일불이 총섭(總攝)하는 것이다. 일체의 구성요소(構成要素)와 일체의 형태(形態)와 일체의 활동변천을 총괄(總括)한 것이 법신대일여래(法身大日如來)라. 그러므로 근본불(根本佛)이며 본초불(本初佛)이며 단일의 상항불(常恒佛)이다.
(1) 석가여래불은 인간으로서 깨쳐, 성불한고로 여팔상록(如八相錄) 법신불과 본질적으로 상이(相異)한 것이다.
(2) 본존관음보살
법ㆍ보ㆍ화(法報化) 삼신을 갖췄으나 다른 불보살은 이런 예가없다. 법신을 갖췄음은 대승장엄보왕경(大乘壯嚴寶王經)에 설(說)한 바와 같이 그 한 털구멍 중에 보현보살이 12년을 돌아도 그 변제(邊際)가 없었다는 것이 곧 이를 말하는 것이다. 또 한 털구멍 속에 백천만억 금산(金山)이 있고 또 무량세계가 있다는 것이 곧 이것을 말한다.
보신(報身)을 갖췄다는 것은 그것이다. 명호를 갖춰서 염하면 다 모두 결박(結縛)한 것이 해탈한다 하며 한번 지옥에 이르면 수족(手足)에 물이 난다함은 모두 목마른 자가 해탈을 얻는다는 것이 이것이며, 화신(化身)을 갖췄다는 것은 보왕경에와 같이 무수한 세계를 두루 다니며 무량중생을 구도했다 함은 성마왕이 되어 대상주를 구도하고 그 밖에 아수라왕을 구도하고 지옥중생과 천인 등 무량중생을 구도한 것이 그 또 관음보살은 현밀에 모두 통하여 이르지 않는 데가 없고 33신으로 화현하여 중생을 구제하니 그런고로 게송에 이르기를「사바왕래 팔천도(八千度)에 삼세이익 동일체」라 하였다.
사) 현밀(顯密)의 세계관(世界觀)의 차이점
현은 심본색말(心本色末)의 관법, 밀은 색심불이의 관법, 현은 부정적(否定的), 밀은 긍정적(肯定的). 부정은 현실도피적(現實逃避的) 긍정은 현실참여적(現實參與的)으로 현실 속에 파고든다.
현은 반과학적 반물질적이지만 밀은 과학을 포섭(抱攝)하고 물질을 구사(驅使)한다.
현은 일원적(一元的)이요, 밀은 이원다원적(二元多元的)이다.
현은 내세(來世)에 치중(置重)하지만 밀(密)은 현세(現世)에 치중(置重)한다.
현은 인분가설(因分可說)의 담이요 (불과佛果를 증證함에 이르기까지의 인위因位의 수행경계修行境界, 즉 상대계相對界)
밀은 과분가설(果分可說)의 담(談)이다. (불과의 경계 곧 절대계絶對界)
가)범불교적(汎佛敎的) 문제, 나)현밀(顯密)의 차이점(差異點), 다)현교와 밀교의 명칭 해설 마)성불론의 차이 <생략>
종교의 변천은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다. 종교 역시 사람들의 생각과 바람이 고스란히 투영된다. 시대적 폐해를 극복하고 혁신을 이루면 발전하고, 그렇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러 안주하거나 타락하면 사그라들게 마련이다.
해방 후 한국불교는 조국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전환기를 맞았다. 조선을 거치며 쇠퇴했던 불교를 어떻게 다시 되살리고, 일제 강점기로 혼탁해진 수행 전통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그것이 과제였다. 고통 받고 있는 국민을 위로하고 척박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빛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불교는 극심한 대립과 갈등에 휩싸였다. 이에 원정대성사는 새로운 불교운동으로서 정통밀교종단을 창종했다.
내세와 기복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현실을 끌어안으라 했고, 모든 것을 마음법으로 돌리며 뜬구름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에게 색과 심이 둘이 아니라 했다. 불교를 허무주의로 잘못 받아들이는 풍조에 대해 삶을 긍정하라 한 것이다.
사실, 불교가 본래 그렇다. 나와 남을 모두 존중하는 철학적 기초가 무아이고, 변화를 알고 희망을 그려나가는 힘이 무상에서 나온다. 다만 믿는 이들이 우매하여 잘못 이해하고 엉뚱하게 실천할 뿐이다. 초기불교, 대승불교, 현교, 밀교, 그 어떤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대중을 바른 길로 이끌고 도울 수 있을 때라야 진정한 불교라 말할 수 있다. 기도, 염불, 명상, 참선, 삼밀, 그 어떤 수행을 닦는다 해도 스스로 부처를 닮아가고 대중을 감화시킬 때 참된 불자라 할 수 있다.
현교에 대한 많은 부정적인 평가는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당시에 팽배해있었던 잘못된 인식과 신행 모습을 지적한 것이며, 여기에서 벗어날 길을 밀교의 가르침에서 찾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우리들은 원정대성사의 신랄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나의 신행이 내세에 기울어져 현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와 내 가족을 향한 이기적인 구복에 머물러 중생구제의 원력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의 우리들에게 던지는 매서운 질타로 들린다.
그리고 비로자나 법신불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본다. 밀교는 비로자나 법신불을 본존으로 모신다. 비로자나 법신 대일여래는 진리 그 자체이다. 불보살님의 상이 아닌 옴마니반메훔 육자진언과 만다라를 모시는 것은 진리 자체를 믿고 따르겠다는 선언이다. 형상이 아닌 진리 그 자체를 신앙하겠다고 할 때는 상당한 근기가 필요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해 불보살님을 의지하지 않고 직접 진리에 가닿겠다고 하는 것이니 적당히 할 수 없다. 선에서 이야기하는 직지인심, 곧바로 본성에 가닿아 견성 성불하겠다는 의지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법신을 이룬다는 것이 무엇인가? 진리가 그대로 자신의 말과 몸과 마음에 구현된다는 뜻이다. 진리와 내가 하나 되는 것이다. 이 몸이 실제로 진리 그대로 된다는 의미이니 그것이 즉신성불이다. 원정대성사는 팔을 들고 다리를 움직이는 모든 행위가 신밀 아님이 없으며, 입을 열고 소리를 내는 모든 말이 구밀 아님이 없다 했다. 즉신성불은 막연하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성불이 곧 법신이다. 법신이 구현된다는 것은 이처럼 내 스스로가 진리의 몸이 된다는 뜻이니 그 목표와 서원이 보통 큰 게 아니다.
결박당하고 목마른 이가 해탈하는 보신의 경지와 무량중생을 구제하는 화신의 경지가 모두 법신불의 화현이니 그래서 원정대성사는 하나의 털구멍에 온 우주가 깃들어있다는 중중무진 화엄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고 했으리라. 그러니 대성사의 말씀처럼 세간사에 얽매여 지낼 까닭은 추호도 없지 않을까?
법신 대일여래를 신앙하는 것은 진리와 내가 하나 되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렇게 원대하고 당찬 서원을 확실하게 세우고 수행 정진한다면 우리의 믿음과 공덕은 나날이 수승해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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