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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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심층밀교는 법경 정사(밀교연구소 소장/법천사 주교)가 글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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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관음 중 두 보살 : 성관음보살ㆍ십일면관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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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3-12-02 17:00 조회13,40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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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서는 관세음보살과 변화관음보살에 대해 살펴보았고, 대표적인 변화관음으로 육관음보살(六觀音菩薩)이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번호에서는 육관음 중에 성관음보살(聖觀音菩薩)과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을 살펴보고, 다음호에서 천수관음보살(千手觀音菩薩) 준제관음보살(准提觀音菩薩)을 그 다음호에서 마두관음보살(馬頭觀音菩薩)과 여의륜관음보살(如意輪觀音菩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관음보살(聖觀音菩薩)
가장 일반적인 관세음보살,변화관음보살의 본신(本身)

가장 일반적인 관세음보살인 성관음보살(聖觀音菩薩) 은 변화관음보살 가운데 다른 다섯 관음보살을 대표하는 보살로 다른 변화관음보살과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래서 정관음보살(正觀音菩薩)이라고도 합니다.
“자비를 베풀어 중생의 번뇌와 고통을 들어주고 나아가서 즐거움을 주는 보살”
이 보살은 관세음보살의 기본 형태의 보살로 자비를 베풀어 중생의 번뇌와 고통을 들어주고 나아가 즐거움을 주는 보살로 묘사됩니다. 그런 이유로 성스러운 관세음보살입니다.

수많은 불보살 가운데 자비를 지니고 있지 않은 불보살이 없고 중생을 구제하고 즐거움을 주지 않는 보살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왜 유독 관세음보살을 자비의 화신이라 하고 중생구제의 대표적인 보살로 묘사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지난호에서도 말씀드린바와 같이,‘중생의 고통 소리를 듣고 중생들을 구제하시는’구세구난(救世救難)의 보살로 다른 불보살 보다도 자비와 베품, 중생구제의 대표적인 보살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특히 무명중생들을 어여삐 여기시고 두루두루 살피시며 중생들의 근기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투시니 어찌 관세음보살이 구세구난(救世救難) 구고구난(救苦救難)의 화신이라 아니 할 수 있겠습니까. 마치 젖먹이 아이에게 아주 소중한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으며 이 성관음보살은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보살의 위신력에 한 가지를 더해 육도(六道) 가운데 아귀도(餓鬼道)에 빠진 중생들을 구제하는 보살입니다.
▶ 성관음보살

성관음보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이 보살의 존상(尊像)은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천의(天衣)를 걸치고 귀와 가슴에 장식을 하고 있습니다. 팔과 손목에는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하고 왼손은 봉우리의 연꽃을 들고 있거나 감로수병을 들고 있는 경우도 있고,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끝을 맞대고 꽃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대개 연꽃은 깨달음, 즉 부처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데, 여기서 꽃봉오리가 만개(滿開)하지 않은 채로 표현된 것은 장차 활짝 피어나 부처가 될 것임을 뜻하고 있습니다. 즉 중생이 무명에 가려 아직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불성(佛性)을 가진 중생이 아직 개현(開顯)하지 못하였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육도(六道) 가운데 아귀도(餓鬼道)에 빠진 중생들을 구제하는 보살”
그러나 개현(開顯)하지 못한 불성(佛性), 왼손의 꽃봉우리를 만개(滿開)토록 하는 역할이 바로 오른손의 연꽃 모양의 수인(手印)입니다. 이러한 형태 외에도 양손을 가슴 위에 두고 보주(寶珠)를 지니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연꽃을 들거나 감로수병을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관세음보살의 대표적인 존상(尊像Z)은 첫째 머리에 보관(寶冠)을 하고 둘째는 한 손에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찰을 순례할 때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보살상을 보게 되면 바로 관세음보살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개 관세음보살상의 머리 위의 보관(寶冠)에는 항상 불상이 하나 새겨져 있는데, 이 불상은 서방 정토의 부처인 아미타불입니다. 아미타불이 바로 관세음보살의 출생보처불(出生補處佛)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찰의 ‘미타전’이나‘극락전‘무량수전’에 아미타불의 삼존불로서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이 모셔지고, ‘관음전’이나 ‘원통보전’에는 바로 주불(主佛)로 모셔지기도 합니다.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
중생의 근기에 따라 열 한 가지의 얼굴로 나투신 관세음보살

성관음보살 다음으로 많이 신앙되었던 관음보살로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이 있습니다. 십일면(十一面)이란 얼굴이 11개란 뜻인데, 머리 위에 11개의 작은 얼굴 모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수많은 중생들을 모두 두루두루 살피기 위하여 11개의 얼굴을 가진 모습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에서 십일면관음보살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이 보살상을 보면, 본신(本身)의 얼굴이 있고, 그 머리 위에 분신(分身)으로 11개의 또다른 얼굴이 있는데, 이를 십일면(十一面)이라고 합니다. 11면의 얼굴은 정수리에 3개, 그 오른쪽에 3개, 왼쪽에 3개의 얼굴이 있고, 정면과 뒷면에 각각 1개의 얼굴이 있습니다. 이를 합하면, 11면이 됩니다. 여기에 본신의 얼굴까지 합하면 총 12개가 됩니다. 그러나 12개라 해서 이 보살상의 이름을 십이면보살(十二面菩薩)이라 하지 않습니다.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이라 한 것은 본신은 빼고 나머지 11면을 지칭하여서 이름붙인 것입니다. 왜 십일면(十一面)을 부각시켰을까요? 이 십일면(十一面)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십일면은 중생들을 제도하는 관음보살의 방편신(方便身)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보살상의 본 얼굴은 본지신(本地身)이고, 11면의 얼굴은 본지신(本地身)의 분신(分身)으로서 바로 방편신(方便身)에 해당합니다. 방편(方便)은 무명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데는 아주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 방편이 바로 11면의 얼굴이라는 것입니다.
▶ 경주 석굴암의 십일면관음상

십일면(十一面)의 면면(面面)을 살펴보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11면의 배열은 일정치 않습니다만, 대개 정수리 위의 세 얼굴은 온화한 자비의 보살상[자상(慈相)]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온화한 모습입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거두어 들이고 있습니다.
“육도(六ㅈ道) 가운데 아수라도(阿修羅道)에 빠진 중생들을 구제하는 보살”
왼쪽의 세 얼굴은 공포와 분노를 상징하는 진노상(瞋怒相)의 얼굴입니다. 화난 얼굴로 악한 사람을 꾸짖으며 말을 듣지 않는 중생들을 타일러서 구제하려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세 얼굴은 백아상출상(白牙上出相)으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얼굴로 선한 중생들에게는 더욱 큰 희망과 용기와 지혜를 불어넣어 주고 있습니다.
후면에 있는 한 개의 얼굴은 크게 웃고 있는 대소상(大笑相)의 얼굴로서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구제하려는 대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앞면에는 여래상(如來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여래상은 얼굴로 되어 있는 다른 10면과 달리 전신(全身)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전신(全身)의 여래상은 바로 부처님을 뜻합니다. 보살상이 아니라 바로 부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여래상은 본래 불성을 가진 중생들이 구경에 이르게 되는 불과(佛果)를 상징한 것입니다.
십일면의 배열은 중생들이 가지는 근심과 괴로움, 병고(病苦)와 장해(障害), 악심(惡心)과 현세의 모든 고통을 여의고 깨달음에 이르게 합니다. 특히 육도(六道) 가운데 아수라도(阿修羅道)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관음보살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십일면관음보살이 지니고 있는 지물(持物)을 살펴보면, 중생구제의 뜻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왼손은 감로수(甘露水)의 정병(淨甁)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염주를 쥐고 있습니다. 간혹 염주를 영락(瓔珞 -구슬 목걸이)으로 보는 사람도 있기도 합니다.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영락이라 표현하지만 불교계에서는 염주로 보고 있습니다. 염주가 좀 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십일면관음보살의 지물(持物)인 감로수(甘露水) 정병(淨甁)은 소원성취를 상징하고, 염주는 중생의 번뇌를 단절시키는 것을 나타고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이 지물은 무명중생의 번뇌를 없애고 일체소원을 성취시켜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십일면과 지물(持物)이 십일면관음보살의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십일면관음은『십일면관음신주심경(十一面觀音神呪心經)』을 근거로 하여 중국과 한국, 일본 등지에서 크게 신앙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십일면관음상이 바로 경주 토함산 자락의 석굴암 본존불 뒤쪽에 조각된 십일면관음상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석굴암의 십일면관음보살상은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와 무지(無知)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일제 강점의 흔적과 소중한 문화유산의 훼손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석굴암의 십일면보살입상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부조(浮彫)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후면의 대소상(大笑相)은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무지한 일본의 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후면의 대소상(大笑相)을 기어이 머리 꼭대기에 새겨 놓았습니다. 십일면관음보살의 수(數)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불심 깊었던 우리 선조들의 안목과 이해력에 감히 비할 바가 못됩니다.
“십일면보살은 나와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
십일면관음보살은 우리에게 커다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십일면의 관음보살이 조각에만 존재하고 있지 않고 항상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십일면의 관음보살들입니다. 우리를 화나게 하는 사람, 반대로 즐거움과 웃음을 선사하는 사람, 온화한 미소로 항상 따뜻함을 전해주는 사람, 마음으로 다가 오는 사람 등 수많은 사람들이 수천 만 가지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마주치는 사람들을 모두 나의 십일면관음보살로 삼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미운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법을 길러주고, 좋은 사람은 변함없이 오랫동안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길러 주고, 모든 것을 걸림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깊은 이해심과 참을성을 길러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우리들의 불보살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우리들의 십일면관음보살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떤 십일면관음보살일까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일까요? 각자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다음호에서 천수관음과 준제관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