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종과 밀교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심층밀교는 법경 정사(밀교연구소 소장/법천사 주교)가 글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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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般若心經)_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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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담마 작성일14-03-24 10:23 조회9,745회

본문


반야심경(般若心經)_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느니라.
故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


‘삼세제불(三世諸佛)’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말하는 것이며, ‘의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蜜多)’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였다는 말입니다. 즉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였다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을 통해서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반야바라밀, 즉 지혜의 완성이 곧 성불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수행도 결국 지혜의 증득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수행의 목적이 재난소멸이나 소원성취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지혜의 증득, 지혜의 완성, 반야바라밀다가 수행의 최종 목적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반야심경』은 ‘의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蜜多)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故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故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는 ‘그런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뜻인데, 바로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 번역합니다. ‘아뇩다라’는 ‘무상(無上)’의 뜻이며, ‘삼먁’은 ‘바른, 완전한’이라는 뜻이고, ‘삼보리’는 ‘깨달음’이란 뜻입니다. 이를 모두 합쳐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 합니다. 혹시 삼보리수행, 삼보리명상이란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깨달음을 이루기 위하여 수행하는 것, 깨달음을 위한 명상 등을 말하는 것인데 국내에 이러한 수행을 행하는 단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언다라니를 통해서 깨달음을 이루고자 수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각설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의 완전한 깨달음’을 말하며, 흔히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고 합니다. 무상(無上)은 ‘더 이상 그 위에는 아무 것도 없는’이란 말로서 ‘최상(最上), 최고(最高)’를 뜻합니다. 정등각(正等覺)을 줄여서 정각(正覺)이라 하는데, ‘바른 깨달음’을 말합니다. ‘보리’는 ‘보디’를 소리나는대로 옮긴 말로서 ‘깨달음’을 가리킵니다. ‘무상정등각’은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말합니다.
최상의 바른 깨달음은 무엇으로 이룰 수가 있는가 하면, 바로 ‘반야바라밀다’를 통해서 가능하다고『반야심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지혜를 통해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의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蜜多)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故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입니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 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지혜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요? 그 답이 계정혜(戒定慧), 육바라밀(六波羅蜜), 팔정도(八正道), 십선행(十善行) 등의 실천수행법입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든 공덕을 이루기 위해서든 우리는 반드시 지혜를 길러내야 합니다.

   수행의 최종적인 목적은 바로 지혜의 완성에 있습니다. 지혜가 있으면 바로 부처가 됩니다. 부처가 되었을 때 우리는 중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부처이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집니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생활 속에서 선정을 이루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생활 가운데 선정을 이룰 때, 마음속에 ‘참 지혜’가 일어납니다. 바른 지혜는 고요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지혜는 마음의 안정에서 나옵니다. 많이 배워서 얻게 되는 지식과는 다릅니다. 설사 많이 배웠다하여도 어리석은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지식은 우리에게 참다운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갈등과 다툼을 불러일으킵니다. 고통과 갈등에서 벗어나는 길은 지식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길러내는 일입니다. 지혜만이 우리를 해탈, 열반으로 안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는 어떻게 길러낼 수 있을까요?
지혜는 자기의 마음을 잘 관찰했을 때 제대로 일어납니다. 자기의 관찰을 통하여 마음의 안정을 이루었을 때 바른 지혜가 일어납니다. 지혜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 마음은 고요한 선정심(禪定心)입니다. 그리고 고요한 마음은 자비심을 바탕으로 합니다. 불보살과 같은 자비심을 지니고 있다면 바른 지혜가 일어납니다. 즉 걸림이 없고 집착이 없는 자비심에서 지혜가 솟아납니다. 그 자비심은 또한 마음을 잘 닦는 데서 나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잘 닦으라고 말합니다. 잘 다스리고 잘 닦는 가운데서 마음의 고요를 얻을 수 있고, 그 고요한 선정심에서 큰 자비와 지혜가 일어나납니다. 즉 마음을 잘 닦아야 바른 지혜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경전에서도 “지혜는 마음의 안정에서 온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안정이 없으면 바른 지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항상 마음이 즐겁고 생각과 마음이 고요합니다. 호수가 깊을수록 맑고 고요한 법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화가 잔뜩 나 있을 때 과연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마음이 삐뚤어져 있을 때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사심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과연 일을 공정하게 처리할 수 있을까요? 이권 다툼에 빠져 있을 때 정말로 바른 결정을 할 수 있을까요?


   단호하게 말씀드립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상태에서 바른 판단, 바른 지혜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실천해야 합니다. 그 실천은 자비심을 바탕으로 한 실천입니다. 자비가 없는 실천은 허깨비와 같습니다. 자비는 오로지 고요한 선정심에서 나옵니다. 고요한 선정심에서 자비심이 있게 되며, 그 자비심에서 우리는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비심과 선정심을 지녔을 때 바른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분별과 집착이 아닌, 부처님과 같은 자비심을 가졌을 때 고요한 마음과 바른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자비심은 절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지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집으로 가득한 마음에는 지혜의 뿌리가 싹틀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 연습은 바로 인욕(忍辱)과 하심(下心)입니다. 인욕과 하심의 마음자리에서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뜨게 되고, 그 눈을 통해 고요한 마음을 얻게 되며, 그 고요함 속에서 참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바른 지혜가 왜 필요할까요?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잘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잘 산다는 것은 재산을 많이 모으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부자로 사는 것, 즉 마음에 걸림이 없고 집착이 없어서 항상 여여(如如)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참다운 인생, 참으로 행복한 삶입니다. 마음에 고통이 없고 재해(災害)가 없으면 그것이 바로 마음의 부자, 즉 행복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지혜를 얻고자 하는 데서 가능합니다. 결국 지혜를 구하는 길은 바로 자신을 살리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사품법문경』에 이르기를, “지혜 있는 자는 재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어리석은 사람은 재해가 있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재해가 없으며, 어리석은 자는 장애와 어려움이 있으나 지혜 있는 사람은 장애가 없으며, 어리석은 자는 허물이 있으나 지혜로운 사람은 허물이 없는 것이니, 마땅히 어리석은 것은 멀리 버리고 지혜로운 법을 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재난이 없으면 우리는 그게 바로 행복입니다. 특히 마음에 고통과 고민, 상처와 재해가 없으면 그것이 바로 마음 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빚이 없으면 그것이 돈을 버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빚이 있으면 제대로 돈을 모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마음에 고통, 고난이 크고 많으면 절대 행복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삶, 참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의 여유와 지혜가 절대 필요합니다.

   우리가 염송하고 불공하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소원성취와 재난소멸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얻는 데 있습니다. 지혜를 얻기 위해 우리는 평소에 부드럽고 평온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마음에는 절대 집착과 불선(不善)한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고, 그 안정 속에 밝은 지혜가 있습니다.

  이러한 수행을 지혜바라밀, 즉 반야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지혜바라밀은 모든 부처의 어머니이며, 육바라밀 가운데 앞의 다른 5바라밀로 통해서 얻어지는 마지막 종착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육바라밀의 실천이 결국 지혜의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공하고 염송하고 정진하는 것은 바로 부처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한 점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작은 것에 매달려 아옹다옹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을 좁게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니 몸과 마음이 고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적으로 말해서,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해탈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염송과 불공은 궁극적으로 내 마음의 안정, 평온을 얻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고통에서 초탈할 수 있는 영원한 행복, 완전한 열반으로 가는 길임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바른 수행이란 마음을 고요히 하여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안정, 선정에서 지혜가 일어나며, 지혜가 일어나므로 모든 것에 평화가 스며듭니다. 이러한 수행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바로 자비심에서 나옵니다. 자비심은 고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표출입니다. 이는 곧 보살심입니다. 보살심은 넓고 크고 둥글고 가득 찬 마음입니다. 이를 광대원만심(廣大圓滿心)이라 합니다. 보름달과 같은 마음입니다. 찌그러진 마음이 아니고 모나지 않으며 둥글고 가득 차고 밝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나 미운 사람이 옆에 있으면 마음속에는 증오심과 적개심으로 가득 차 세상은 곧 지옥이 됩니다. 그 마음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여러 가지이고 그 작용 또한 다릅니다. 이것은 지혜 있는 마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어리석음은 탐진치 삼독 가운데 하나로서 수행에 방해만 일으키고 육도를 윤회케 하는 나쁜 씨앗입니다. 이 어리석음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내 마음에 자비심을 채우는 것입니다.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노력하면 반(半)은 닮아갑니다. 그 노력이 정진입니다. 이 정진으로 지혜가 완성이 됩니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육바라밀 수행, 육바라밀의 실천입니다.

진심, 원망심이 가득 찬 상태에서는 절대 따듯한 마음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지혜의 증득은 말할 것도 없고, 소원성취도 이룰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악업만을 지을 뿐입니다. 악업을 쌓고 있는데 어떻게 공덕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혜를 완성하고 소원을 성취하는 길은 바로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자비심을 내는 것입니다. 자비심이 없으면 탐진치, 교만심, 의심, 고집 등의 티끌 속에 묻혀 지혜의 광명을 밝힐 수 없습니다.
마음의 조화는 진공묘유(眞空妙有)라. 참으로 공한 가운데 묘하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작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고통과 평온, 불행과 행복으로 갈라집니다. 행복과 불행정녕 행복하고 자유롭고 충발된 기쁨 속에서 살고자 한다면, 마음속에 삿된 것은 모두 비우고 오로지 자비를 채워야 합니다.
지혜와 자비심을 기르기 위하여 생활 가운데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집착하면 지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미운 것은 밉다고 집착하고, 나쁜 것은 나쁘다고 집착하며, 화가 난다고 또다시 화내는 마음을 반복해서 일으키고, 내 뜻대로 안된다고 원망 진심을 일으켜서는 자비와 지혜를 싹틔울 수 없습니다.

   자비행(慈悲行)은 무집착(無執着), 바로 집착 없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나의 고집, 나의 관념, 나의 애착으로 만든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면, 저절로 반야 지혜가 됩니다. 이로써 마음의 평화, 해탈을 얻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지혜는 왜 필요합니까?
   첫째는, 악업을 짓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공덕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구경성불?즉신성불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악업을 짓지 않기 위해서, 공덕을 이루기 위해서, 구경성불을 위하여 우리는 지혜를 닦고 또 닦아야 합니다. 그 실천을 통해서 자비와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큰 공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를 강조한 것이 바로『반야심경』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다.’는 내용입니다. 삼세에 모든 부처님도 지혜를 얻음으로써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그 깨달음은 무엇에 대한 깨달음인가 하면, 바로 세상 이치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세상 이치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무상(無常)이며 무아(無我)이므로 일체가 공(空)하다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메시지가『반야심경』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앞의 경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密多故) 심무가애(心無?碍) 무가애고(無?碍故) 무유공포(無有恐怖)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구경열반(究竟涅槃)’인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으며,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완전한 열반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즉 공(空)의 이치를 깨달아서 집착이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지혜, 반야바라밀인 것입니다. 이생이 다하도록 지혜를 닦읍시다.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