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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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般若心經_②
 작성자 : 담마
작성일 : 2014-03-03 13:02     조회수 : 4,135  



반야심경般若心經_②


▶ 일체법이 공(空)하다는 이치를 설함

『반야심경(般若心經)』은『대반야경』의 정수(精髓)를 뽑아서 만들어진 것으로 총 270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의 제목이 10자, 경문(經文)이 260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 270자 속에는 불교의 공사상(空思想)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일체의 법이 모두 공(空)하다는 이치를 설하면서, 보살이 이 이치를 관(觀)하면 일체 고액(苦厄)을 멸하고 열반을 얻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경의 내용을 한 구절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반야심경(般若心經)』에 대한 해설서는 시중에 무수히 나와 있으므로 깊이 있는 내용을 알고 싶은 분은 책을 구입하여 보는 것이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나 여기서는 간단하게 언급하여 개략적인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깊은 뜻 보다 사전적인 의미에 그치고자 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摩訶)’는 산스크리트어로 mahā라고 하며, ‘크다’는 뜻입니다. 또 ‘위대하다’ ‘많다’ ‘뛰어나다’는 뜻이 있고, 존칭의 의미로도 쓰입니다. 예를 들면 마하가섭과 같은 경우입니다.
‘반야(般若)’는 Prajṅa라고 하는데, ‘지혜’의 뜻입니다. 무슨 지혜인가 하면, 깨달음을 얻는 지혜, 진실을 보는 지혜입니다. 그 지혜는 일체법의 실다운 이치를 아는 힘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지혜를 얻으면 곧 성불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지혜를 얻기 위하여 삼업청정, 계정혜, 육바라밀, 십선업을 닦고 실천해야 합니다.
‘바라밀다(波羅蜜多)’는 산스크리트어로 pāramita라고 하는데, ‘저 언덕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이를 한문으로 도피안(到彼岸)이라고 합니다. 저 언덕은 열반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성취’, ‘성불(成佛)’을 의미합니다.
저 언덕에 이르기 위해(바라밀다) 행하는 여섯 가지의 실천법을 육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육바라밀을 통해서 바라밀다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경(心經)’은 ‘핵심적인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260자로 설명하고 있는 경문(經文)의 내용입니다.

위의 내용을 모두 합쳐서 풀이하면, ‘큰 지혜로써 저 언덕에 이르게 하는 핵심적인 부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의 핵심이 바로 공(空)이라는 것입니다. 공(空)한 이치를 깨달으면 바로 그것이 지혜의 완성이며, 성불이라는 말씀입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과 같은 보살입니다. 구마라집은 관세음보살이라 번역하였고 현장 법사는 관자재보살이라 번역하였습니다. 이 경에서 일체가 공(空)임을 비춰 보고 일체의 고통과 재앙을 모두 여의신 분이 바로 관자재보살입니다. 이에 사리불이 관자재보살님께 여쭈니 답을 하신 내용이 바로 그다음의 경문들입니다. 이를 증명하고 계신 분은 당연히 부처님입니다.
이 경의 설주(說主)와 관행자(觀行者)는 관자재보살이고 설문자(說問者)와 청문자(聽聞者)가 사리불(사리자)입니다만 실제 설주(說主)는 부처님이라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 자신의 성불의 경지를 관자재보살과 사리자를 내세워 대화형식으로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위의 경문은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모두가 비어 있음을 비추어보고 모든 괴로움을 여의었다’는 뜻입니다.
‘행심반야바라밀다’는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때’라는 의미로 지혜를 얻기 위하여 깊은 수행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육바라밀 가운데 지혜바라밀을 행하고 있습니다. 깊은 선정에 들어서 이제 지혜바라밀을 닦아 지혜에 도달하였습니다. 도달하고 보니 일체가 공(空)하다는 것임을 알아 차렸습니다. ‘공(空)’은 ‘비어있다’ ‘허공’이란 말로 번역합니다만 ‘비어있다’는 뜻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로 바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글 반야심경을 독송할때 어쩔 수 없이 ‘비어있다’는 의미로 읽습니다만 이해를 할때는 ‘고정된 실체로 영원한 것은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무상(無常), 무아(無我)이므로 공(空)인 것입니다. 이 바탕에는 연기(緣起)의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뒤에 가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견오온개공’에서 ‘오온(五蘊)’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의미하는데, 바로 일체 존재의 구성요소를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일체)는 바로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색色)’은 물질이오, ‘수(受)’는 느낌, ‘상(想)’은 생각, ‘행(行)’은 움직임, ‘식(識)’은 인식, 의식작용을 말합니다. 인간의 육신이 ‘색(色)’이오,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분별하는 모든 행위가 ‘수상행식(受想行識)’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여러 가지 업을 짓게 됩니다. 오온이 흩어지면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것이고, 오온이 화합하면 육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색이 다 하면 수상행식도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육신이 다 하면 생각도 느낌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존재의 구성요소를 십이처(十二處), 사대(四大)와 함께 오온(五蘊)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온이 모두 공(空)함을 비추어 본다는 것은 오온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육신이 다하면 모든 것도 다 하는 법입니다. 영원한 것이 없으므로 있다 없다에 집착하지 말며 그 어느 것에도 걸림없이 중도(中道)로써 살아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오온개공’은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뜻으로, 고정된 실체가 없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조견오온개공’은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 본다’는 뜻으로 ‘오온이 공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일체의 고통과 재앙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 ‘도일체고액’입니다.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은 곧 지혜의 완성에 있다는 말입니다. 즉 바라밀을 통하여 반야(지혜)를 이루면 이것이 곧 해탈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지혜의 증득은 불교수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최종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공부를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청정지계(淸淨持戒)를 통해 선정(禪定)에 들고 깊은 선정 속에서 반야(지혜)를 이룰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도일체고액’은 불교수행의 목적이자 오늘날 우리들의 힐링(치유)의 열풍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이 경문은 ‘사리자여, 물질이 허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허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므로, 물질이 곧 허공이요 허공이 곧 물질이며, 감각 지각 행위와 의식 또한 그와 같으니라’라는 뜻입니다.
즉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하다’는 것을 다시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오온(五蘊)이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므로, 오온(五蘊)이 공(空)하므로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도 공(空)하다는 설명입니다. 오온(五蘊)을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나열하여 설명한 것으로, 오온(五蘊)이 공하므로 색(色)도 공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도 그와 같이 공하다는 말입니다. 같은 말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오온개공’의 구제적인 설명이 바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입니다.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이 경문은 ‘사리자여,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니라’라는 뜻입니다.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은 ‘제법(諸法)의 공(空)한 모양’이란 뜻입니다. 제법(諸法)은 일체(一切) 또는 일체법(一切法)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법,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공한데 그 공한 모양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온개공’하므로 ‘색수상행식이 공하며’ 이 뿐만 아니라 더나아가서 ‘모든 존재(제법, 일체, 일체법)도 공하다’는 말입니다. 그 ‘제법공상(諸法空相)’에 대한 설명이 바로 그 뒤에 이어지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의 내용입니다. 모든 것이 공한데, 어떻개 공한가 하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앞서 말씀드린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온이 공하므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므로 오온이나 색이나 모두가 공하고 공한 것은 일체라는 것입니다.
그 공(空)한 것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가 하면, 바로 연기성(緣起性)이기 때문입니다. 일체 모든 것은 연기해 있으므로 고정된 실체가 없고(無我)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無常). 그래서 공(空)하다는 것입니다. 연기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일체는 모두 무상(無常)한 존재이며, 무아(無我)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무상과 무아의 연기(緣起)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으로 유명한 구절이『잡아함경』에 나오는데,「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하며,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일체가 모두 연기해 있다는 것으로, 연기하여 존재하므로 고정된 실체가 없고 무상(無常)이며 무아(無我)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空)하다는 것입니다. 즉 공(空)은 무상(無常), 무아(無我), 연기(緣起)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반야심경』에서는 그 공(空)의 내용을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체가 무상 무아이므로 공이오, 공하므로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하다는 것도 없으며, 늘어난 것도 없고 줄어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공(空)은 우리의 인식과 육안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무상(無常)의 세계입니다. 예를 들어, 어제는 내가 굉장히 화가 났다고 칩시다. 그런데 어제와 달리 오늘은 화가 온데 간데 없고 즐거움만 가득하다고 할 때 과연 어제의 화는 영원한 것입니까? 영원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고 화는 지금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어제는 분명히 있었지만 오늘은 흔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화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있다고 할 수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으며, 또 있다고 해도 맞고 없다고 해도 모두 다 맞습니다. 그것은 내일이면 또 나타날 수 있고 며칠 동안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존재 유무의 실상을 친절하게 설명한 것이 바로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일체가 공한데 생멸이 본래부터 없으며, 더럽고 깨끗하다는 분별도 없고,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경문은 곧 우리 중생들에게 ‘실상(實相)을 바로 알아서 집착과 분별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일체는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이므로 공(空)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금강경』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라는 말인데,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공(空)하므로 어디에도 걸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집착과 분별을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보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현대인들의 마음 치유법이 바로『반야심경』과『금강경』에 그대로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길 뿐만 아니라 정신건강을 위한 길이 바로 경전 속에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 다음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