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종과 밀교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심층밀교는 법경 정사(밀교연구소 소장/법천사 주교)가 글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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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般若心經_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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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담마 작성일14-03-10 11:19 조회12,0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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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般若心經)


시고 공중무색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는 색(色)이 없고,
是故 空中無色

무수상행식 수상행식(受想行識)도 없으며,
無受想行識

무안이비설신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도 없고,
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도 없으며,
無色聲香味觸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눈의 경계에서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다.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위 경문(經文)의 ‘시고 공중무색(是故 空中無色)’은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 색(色)이 없다’는 말인데, 이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공(空)입니다. 공(空)을 없다(無)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없다는 것도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유무(有無)가 존재하는 무(無)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공(空)을 ‘없다’는 뜻의 무(無)로 표현하다 보니 마치 공(空)이 무(無)와 같은 의미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 무(無)는 유(有)와 상대(相對)적인 개념이 아니라 유무(有無)를 포함하면서도 유무(有無)를 떠난 무(無)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空)입니다. 즉 중도(中道)적인 입장에서의 무(無)이자 공(空)을 내포한 무(無)입니다. ‘없다’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무상(無常)의 존재가 있으면서도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고정되지 않을 뿐이지 변화하는 존재 그 자체는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이 공(空)입니다. 있다고 해도 맞고 없다고 해도 맞습니다.
위의 ‘시고 공중무색’의 경문은 바로 이러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만 고정된 실체로서는 없기 때문에 표현상 ‘없다[無]’고 한 것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없다’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결국 집착할 것도 없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집착이 없으니 당연히 걸림이 없고 고정된 유무(有無)도 없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은 바로 이러한 공(空)을 말하면서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도(中道)의 삶을 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 중도의 바탕이 바로 공(空)입니다. 그러므로 집착과 걸림에서 벗어나는 길은 곧 공(空)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며 생활 속에서 공(空)의 이론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空)의 실천이 곧 중도(中道)의 길입니다. 중도(中道)는 양 극단을 피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중도의 가르침 속에는 집착과 분별, 편견을 갖지 말며, 이로 인하여 반목과 대립, 갈등을 일으키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한 중도의 삶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하면 바로 공(空)의 바른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공(空)하다’는 이치를 깊히 깨달으면 갈등과 대립은 사라지고 자비와 지혜가 일어납니다.

공(空)의 이치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모든 것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진리를 불교에서는 오온(五蘊),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를 일러서 일체 존재의 구성요소라고 합니다. 오온(五蘊)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하며, 육근(六根)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을, 육경(六境)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식(六識)은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을 말합니다. 경문(經文)에는 육식이 나열되어 있지 않지만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界 乃至 無意識界)’가 바로 육식(六識)을 말하는 것입니다.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의 경계를 모두 열거하여도 되지만 이를 생략하여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라고 한 것입니다. ‘공(空) 가운데는 눈의 경계(眼界)에서부터 의식의 경계(意識界)까지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나열하면, ‘눈의 경계도 없고, 귀의 경계도 없으며, 코의 경계도 없고, 혀의 의 경계도 없으며, 몸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온(五蘊)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구성요소를 말하고, 이를 다시 열 둘로 풀어놓은 것이 육근(六根)과 육식(六識)이며, 육근(六根)은 감각 기관이고[인식 주체], 육식(六識)은 인식하고 분석하는 의지 작용이며[인식 작용], 육근(六根)의 인식 대상을 육경(六境)이라 합니다.[인식대상]
이 가운데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을 합쳐 십이처(十二處)라 하고, 여기에 육식(六識)을 더하여 십팔계(十八界)라 합니다.
십이처는 인식하고 느끼는 육근(六根)과 인식 대상인 육경(六境)을 말하는 것으로, 바로 인간과 우주 법계를 뜻합니다. 즉 육근(六根)은 인간의 육체를 말하며, 육경(六境)은 인간의 바깥경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에 육경(六境)을 상대하여 육근(六根)이 인식과 의지 작용을 일으키는데, 이것을 육식(六識)이라고 합니다. 육식(六識)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셋을 십팔계라 하는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우주 법계가 성립되고 상호작용하는 것을 분석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육경은 인간의 바깥경계[外]라 할 수 있고, 육근과 육식은 인간의 내적 경계[內]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내외가 공존할 때 삼라만상이 존재하고 사라질 때 일체가 멸하게 됩니다.

이를『대승기신론』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세간의 모든 경계가 다 중생의 무명망심(無明妄心)에 의하여 지탱되고 유지하니, 이런 까닭에 일체법이 거울에 비친 형상과 같아서 실체를 얻지 못하나, 다만 마음이 생기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는 것이니, 만약 마음이 멸하면 법도 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바깥경계는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아니,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받아들여진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미운 사람이 있는 법인데, 미운 사람은 행동하는 것 모두가 못마땅하고 좋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석존께서도 인간의 여덟 가지 고통(八苦) 가운데 ‘미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고통(愛憎會苦)’이라 말씀하셨을까요.
미운 사람이 아무리 착한 짓을 해도 좋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중생입니다.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일반의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나쁜 사람이 아닌데도 나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항상 나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이 아주 좋게 보일때가 있지요. 물론 내가 변했을 수도 있고 그 사람이 더 좋은 사람으로 변했을 수도 있겠지만, 마냥 밉기만 하던 사람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 여기는 순간 이제는 그 사람을 칭찬하고 챙겨주기까지 하는 경우가 있지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바로『반야심경』의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의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이 이것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는 색(色)이 없고, 수상행식(受想行識)도 없으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도 없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도 없으며, 눈의 경계에서부터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근과 육식이 바뀌고 육경이 변하니 미운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육근과 육식, 육경이 고정되지 않으므로 그렇게 변한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원수가 될 수 있고 또 은인이 될 수도 있는데, 밉다 좋다 할 것이 없습니다. 밉고 좋은 것에 일비일희하지 말고 그러려니 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이와 같은 마음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생활 속의 공(空)의 이해이자 중도(中道)의 실천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육근과 육식, 육경은 무상(無常)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상(無常)하므로 공(空)한 것입니다. 공한 것인데 우리는 허망한 마음으로 모든 악업을 짓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육근과 육식으로 일체 죄업을 짓고 있습니다.
이를『화엄경』에서는 ‘삼계(三界)가 마음에 의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십이인연도 그러하고 생사가 다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멸하면 생사가 다하여 사라질 것이다.’라고 하였으며,『대승기신론』에서는 ‘마음이 생기면 모든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모든 법이 멸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음뿐만이 아닙니다. 오온 가운데 색수상행(色受想行)이나 육근 중의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도 그렇고, 육경 가운데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도 모두 때에 따라 멸하고 생하는 것입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공(空)입니다.
그래서『반야심경』에서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라고 한 것입니다. 이를 줄여서 달리 표현하면 ‘시고 공중무오온 무육근 무육경 무육식’이 되겠지요.

경문(經文)에서 ‘공(空) 가운데는 색도 없고 수도 없고 식도 없고 행도 없고 식도 없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공(空) 가운데는 아무 것도 없다(無)’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공(空)과 무(無)는 모두 ‘고정된 실체가 없고 영원하지 않다’는 것으로, 이는 곧 무상(無常)과 무아(無我)과 같은 말입니다. 즉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는 바로 공(空)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하다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이므로 색수상행식,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안계 내지 무의식계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색수상행식은 우리의 감각기능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어찌 영원하며 고정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이 색수상행식[오온]이고, 안이비설신의[육근]이며, 색성향미촉법[육경]과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육식]입니다.

일체 제법(一切 諸法)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위의 오온과 육근, 육경, 육식도 모두 공하다고 한 것입니다. 공하기 때문에 집착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반야심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250자의 글자가 각기 다르지만 그 내용은 결국 ‘공(空)’ 하나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반야심경』전체에 흐르는 키워드는 바로 공(空)입니다. 공(空)의 이치를 여러 가지로 나열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체 제법이 공하다는 이치를 깨달아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육근과 육경, 육식이 공하므로 오로지 자신의 육근과 육식을 잘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바같 경계[육경(六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죄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육근과 육식이 문제 덩어리입니다. 옴마니반메훔.

다음호에 계속 이어집니다.